회계법인-회계사 소송 회오리

  • 입력 2002년 8월 13일 18시 49분


《공인회계사 J씨는 1997년 세원합동회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대학 동기동창이 대주주인 ㈜에이텍의 회계감사 일을 맡았다. 하지만 이 일로 J씨는 현재 투자자들에게 10억원을 물어줘야 할 위기에 처했다. 에이텍은 96년 불량자산 61억원을 은행예금인 것처럼 분식회계를 했다가 99년 부도를 냈고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부실감사를 했다”며 대표회계사와 J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기 때문. 지난해 10월 1심에서 진 J씨는 현재 “억울하다”며 항소 중이다.》

요즘 회계법인과 공인회계사들은 ‘사면송사(四面訟事)’의 위기에 처했다.

J씨의 사례처럼 외환위기 이후 투자자들이 잇따라 소송을 내고 있는 데다 12일에는 공기업인 예금보험공사까지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소송이라는 칼을 집어들었다. 여기에 미국 기업들의 ‘분식회계 파동’의 영향으로 사회적 감시망도 촘촘해지고 있다.

특히 예보는 13개 부실기업을 감사한 다른 회계법인으로 소송을 확대할 움직임이어서 업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회계감사인 소송의 두 갈래〓12일 예보의 결정으로 안진회계법인은 회사와 투자자 양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됐다.

우선 예보의 ‘지시’에 따라 과거 고객이던 ㈜고합이 곧 소송을 낸다. 이에 앞서 대우전자의 소액주주 365명은 2000년 10월 대우전자와 전(前) 임원 10여명, 안진회계법인을 상대로 소송을 내 심리가 진행 중이다.

투자자이건 회사이건 원고가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회계법인과 회계사가 임무를 게을리 해 손해를 보았으니 배상하라”는 것.

고합은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17조 1항에 따라 “회계법인이 회사의 분식회계를 바로잡지 않아 회사가 결과적으로 세금과 배당금을 더 지급했다”고 주장할 예정이고 소액주주들은 2항에 따라 “허위 재무제표를 진실한 것으로 믿고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의 판단 사례〓90년 이후 현재까지 부실감사와 관련해 회계법인과 회계사에 대해 제기된 소송은 금융감독원에 보고돼 알려진 것만 22건. 97년 한국강관 부실감사사건에 대해 첫 대법원 판례가 나온 뒤 하급심 판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金柱永) 변호사는 “회계사가 대가를 받고 고의로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경우와 회사에 속은 경우가 있지만 재판에서의 쟁점은 똑같이 회계사가 감사인의 의무를 게을리 했는지, 아니면 충실히 이행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의무는 회계감사기준이나 회계감사준칙을 꼼꼼히 지키는 것. 한국강관사건에서 대법원은 청운회계법인에 대해 “재고자산에 대한 실사절차를 소홀히 했고 받을 어음과 외상매출금 등 매출채권을 확인했어야 하는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청운회계법인은 재고자산 2000여개 종목 가운데 단 36개 종목만 확인했고 있지도 않은 받을 어음 209억원을 회사가 제시한 잔액증명원만 보고 믿었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21부는 에이텍사건에서 “회계사가 형식적인 은행조회서 만을 근거로 회사가 꾸며낸 재무제표를 그대로 인정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힘 얻는 전문가 책임론〓부실회계에 대해서는 사회적 비난도 크지만 법과 법조계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특히 일반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을 내는 쪽이 소송을 당한 쪽의 잘못을 입증해야 하지만 외감법은 소송을 당한 회계사가 스스로 회계감사기준과 회계감사준칙에 정해진 의무를 다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했다.

법무법인 한강 최재천(崔載千) 변호사는 “회계사는 전문인이어서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확립된 ‘전문가 책임(professional liability)’ 이론에 따라 일반인보다 높은 수준의 주의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 법원도 의사나 변호사에게 일반인보다 높은 수준의 주의 의무를 요구하고 있다”며 “재량과 권한을 많이 갖고 있는 전문가일수록 책임도 많다는 상식에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도 뉴욕증권거래소나 나스닥에서 거래되는 기업은 1933년 제정된 증권거래법의 적용을 받는다. 이 법에 따라 ‘회사가 제출한 재무제표에 중대한 오류나 누락이 있고 투자자가 주식을 매입해 손해를 봤다’는 사실만 입증되면 회계법인은 민사 배상책임을 진다.

미연방 상법은 또 은행 등이 회사의 잘못된 재무제표를 믿고 대출해줬다가 손해를 보면 재무제표를 감사한 회계법인이 책임을 지도록 했다.

▽회계사들의 반론〓이에 대해 일부 회계사들은 “모든 회계사를 ‘피고’로 만들 셈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안건회계법인 정민근(鄭珉根) 전무는 “최근의 소송사태는 외환위기 이전 회계감사를 둘러싼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라며 “마치 회계사들만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감사수수료가 턱없이 싸서 충분한 인력과 시간을 투입할 수 없고 △과거 대부분의 기업이 관행적으로 장부를 조작했으며 기업이 조직적으로 감춘 부분을 찾아내기는 힘들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회계사들이 말하는 현장 애로▼

공인회계사로 감사 경력 10년차인 A씨는 5년 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연간 매출액 1조원이 넘는 회사에 감사를 나갔는데 매출채권 회전율이 다른 기업보다 낮고 관련 자료가 제대로 없더군요.”

A씨는 회계담당자를 통해 거래처에 매출확인서를 보냈으나 답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세법상 손비인정한도인 매출액의 1%만 대손충당금으로 잡아놓고 있었다.

“충당금을 500억원 더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회사에서 펄펄 뛰더군요. 회계법인의 담당 파트너에게 보고했더니 ‘충당금을 더 쌓으면 회사 순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회사에서 감사인을 바꾸겠다고 하니 올해는 그냥 넘어가고 내년에 수익이 나면 그때 가서 털자’고 하더군요.”

A씨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팀에서 빠졌고 얼마 후 사표를 냈다. 이 회사는 외환위기 때 곧바로 부도가 났고 금융감독원의 특별감리에서 분식회계 사실이 적발됐다.

▽기업의 감사인 교체 협박〓대우그룹 분식회계로 옛 산동회계법인이 문을 닫기 전까지 기업이 감사계약을 미끼로 공인회계사를 협박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런 행태는 지금도 남아 있다. 국내 ‘빅5’ 회계법인에 근무하는 B씨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한 중소기업을 감사하던 그는 회사대표가 회사에서 가지급금 형태로 10억원을 빌려간 사항을 주석에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회사측은 “사장이 내년에 갚을테니 눈감아 달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감사인을 바꾸겠다”고 협박했다. B씨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나 이듬해 회사는 감사인을 바꿔버렸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감사 보수를 받기 위해 수십억원짜리 소송을 당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한국외국어대 조장현 교수는 “미국의 최근 개혁법안처럼 최고경영자(CEO)와 재무책임자(CFO)가 재무제표에 분식이 없다는 사실을 보장하도록 해 책임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식 감사〓거대 기업의 연간 거래 규모는 수조원이 넘는다. 그러나 감사는 회계사 10여명이 30∼45일 동안 맡는다. 따라서 특이 사항이 있는 계정과목만 감사할 수밖에 없다.

경력 7년차인 C회계사는 “회사의 자료 협조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국내외 수백개 사업장에서 벌어진 거래내용 가운데 겨우 몇십건을 표본추출해 증빙서류를 확인한다”면서 “회사가 분식회계 금액을 여러 계정에 조금씩 분산시키면 찾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감사를 마치고 나면 ‘코끼리 뒷다리만 만지고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토로했다.

회계사 D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감사를 맡은 회사의 물류창고 10개 가운데 기말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2개를 표본으로 골랐다. 그런데 회사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밤에 몰래 창고에 가봤다.

“다른 창고에 있는 물건을 감사대상으로 꼽은 창고로 옮기고 있더군요. 그래서 다음날 감사 대상 창고를 다른 곳으로 바꿨더니 창고의 절반이 비어 있었습니다.” 이런 기말재고 부풀리기는 전형적인 분식회계 수법이다.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이정조 사장은 “상장법인의 80% 이상이 12월 결산법인인 현실을 감안할 때 분기별 감사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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