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감전사 유족들 하소연 “이게 어떻게 단순익사입니까”

  • 입력 2002년 7월 10일 18시 38분


“어떻게 그 악몽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친구들하고 차 한 잔 마시고 금방 오겠다며 나갔던 외아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한국 화단(畵壇)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인 이강소(李康昭·59·서울 서초구 서초4동)씨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손이 떨려 붓을 잡을 수가 없다. 경기 안성시에 있는 화실에 가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 오기 일쑤다.

지난해 7월15일 새벽 외아들 진명(珍明·당시 25세·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4년)씨는 밤새 퍼부은 호우로 도로가 최고 1m 이상 잠긴 서초동 진흥아파트 앞길의 가로등 근처를 지나다 가로등에서 누전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에 감전돼 즉사했다.

이 지점에서는 진명씨 외에도 윤승재(尹勝載·당시 27세·회사원)씨와 홍순후(洪淳厚·당시 18세·모 대학 1년)군 등 2명이 몇 시간 차로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승재씨의 아버지 윤직(尹직·58)씨도 이 사고 이후 웃음을 잃었다. 순후군의 아버지 홍종협(洪鍾協·48)씨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이들에게 가로등 관리 책임이 있는 관할 서초구청과 서울시가 보인 반응은 행정당국의 도덕적 해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서울시는 사고 직후 현장을 조사한 뒤 “가로등 감전사가 아니라 익사로 판단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서초구청의 한 직원은 “왜 위험한 물 속을 걸어갔느냐”고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하기도 했다.

윤씨와 홍씨는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해 ‘전류흔 있음, 또는 감전으로 자구력을 잃은 상태에서 익사’라는 판정을 받아냈다.

또 이씨는 사고 현장에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건 뒤 이들이 감전사한 것이 사실이라는 증언을 다수 확보해 이를 문서화해 경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들 유가족은 지난해 11월 12일 서초구청과 서울시를 상대로 가로등 설치 및 관리상의 하자를 들어 서울지법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판결은 23일에 내려진다. 지난해 여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로등 감전사’의 책임을 누가 지느냐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난해 집중호우 때 가로등 누전으로 감전사했다며 서울시와 관할 구청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들 외에도 9일 소송을 낸 동작구 이모씨(당시 19세)의 유족 등 서울지역에서만 모두 8건에 이른다. “돈을 바라고 송사를 한 게 아닙니다. 행정당국에 배상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끝까지 싸울 겁니다. ” 홍종협씨가 밝힌 소송 이유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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