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례입시 '그들만의 전쟁'…전문학원 해외까지 진출 성업

  • 입력 2002년 2월 28일 19시 01분


“한용운의 시 ‘당신을 보았습니까’의 주제는, ‘굴욕과 절망

속에서도 구원을 소망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굴욕’이 뭐예요?”

“그건 ‘모욕’이랑 비슷한 말이지. 어이, 그 옆의 학생아, 굴욕을 영어로 뭐라고 하지?”

2월 18일 오후 9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재외국민특별전형 입시전문 S학원.

‘국어 특강’ 수업이 한창이다.

학생들의 책상 위에서 각종 논설문들이 실린 ‘장문 독해’ 등 영어참고서같은 제목을 단 국어교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또래들에게 뒤지는 분야는 역시 국어 과목. 모든 대학에서 빠지지 않는 입시 과목이기 때문에 특례생들은 다른 과목에 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정시만큼 어렵다?

‘재외국민 특별전형’은 부모와 함께 외국에서 고교 1년을 포함해 최소한 3년 이상 수학한 학생들이 대학 입시 때 부여받을 수 있는 특수 전형방법. 정원의 2% 이내에서 정원 외로 선발된다.

특례입시의 시작은 서울대가 78학년도 ‘외교관 자녀’라는 이름으로 특별 전형을 시작한 것. 이후 다른 대학들이 뒤따랐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전까지 특례입학 지원자 수는 매년 700∼800명이었다. 그러나 99학년도부터 연간 1500여명 이상으로 특례 지원자가 급증했고 2002년도 지원자는 1700여명으로 추산된다. 97년부터 특례 대상자 해당 범위가 외교관 상사원 자녀에서 자영업자의 자녀까지로 확대됐다. 한국사회가 급격히 국제화됨에 따라 해외생활의 이점을 살려 국내에서 활동하려는 ‘역유학파’ 학생도 늘고 있다.

전국 4년제 대학의 특례생 정원은 5000여명. 산술적으로는 입학 대상자보다 모집 정원이 많지만 실제로 특례생들이 노리는 학교는 서울 소재 명문대와 의대, 법대 등 인기 단과대학이라 상위권 대학의 경쟁률은 5대1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쟁 속에서 성업 중인 곳은 특례전문 학원들이다.

●학교 같은 학원

지난해 10월 연세대 재외국민입시에서는 수학의 두 문제와 국어에서 한자어 독음을 다는 문제가 모 특례전문학원에서 ‘찍은’ 문제와 같았다며 학부모들이 학교 당국에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검찰의 내사 결과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특례생들의 치열한 입시경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대치동 역삼동과 송파구 잠실동 등 강남 지역에 특례학원이 생긴 것은 10여년 전. 3,4년 전까지만 해도 ‘그룹과외’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수강 정원 100∼500명인 중대 규모 전문학원이 생겼다.

특례 준비생들에게 학원은 학교 같은 역할을 한다. 미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7년간 살았다는 S학원 수강생 권모군(17·H고 3년)은 “어차피 수능 위주의 수업이 나 같은 학생은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국어를 빼놓고는 수업을 거의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선 학교에서 특례생들만 따로 지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수강생들은 학교가 끝난 뒤 곧장 학원에 온다. 특례학원은 국어 영어 수학 외국어 논술 등의 과목을 중심으로 하루 4시간씩 주 6회 수업을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S학원에서는 얼마 전 한 뷔페식당에서 이 학원 출신 2002학년도 대학 신입생들과 학부모를 모아놓고 졸업식을 하기도 했다. S학원 졸업생들은 인터넷으로 동문회를 만들어 정기 모임을 갖는다.

‘특례생’ 선발시험은 학교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개 70% 이상이 주관식. 과거의 대학별 본고사와 비슷하다. 국어 영어 수학이 기본이며 여기에 외국어논술이나 과학 시험이 추가되는 정도다.

영어 과목은 특례생들의 전략과목이자 위험과목이다. 시험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다. 상위권 대학 측에서는 “어휘와 독해의 출제 수준은 미국 대학원 입학 수능시험인 GRE와 맞먹을 정도”라고 말한다.

서울대는 영어를 아예 영문 에세이로만 평가하고, 다른 대학도 영어 논술을 높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특례 종합 S학원은 외국인 강사를 두고 있다. 에세이 작성을 준비시키며 사회과학책에서 발췌한 독해자료들과 논리 전개 방법은 한국인 강사가 가르치고, 외국인 강사는 주 1회 원어 강의와 함께 이들이 실제로 작성한 에세이를 원어민 시각에 맞게 꼼꼼이 고쳐주는 식이다. 비영어권인 중국 일본 등에서 공립학교를 다닌 학생들의 경우 현지어는 잘 하지만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상위권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세계 속의’ 특례학원

S, 다른 S, 또 다른 S, H, L학원. 특례를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 종로나 대성학원만큼 익숙한 이름이며 대부분 종합반 형식으로 운영된다. 특례학원들은 “굳이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아도 한 해 입시만 잘 치르면 전세계적으로 소문이 퍼진다”고 말한다. 해외에 나가 있는 주재원 학부모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해 학원 정보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S특례학원의 교무실에서는 수업이 없는 교사들이 당번을 정해 상담을 맡는다. 상담 교사는 “시차가 있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걸려오는 한국 학부모들의 상담 전화를 받는 것도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다. 기자가 교무실을 지켜보던 오후 9시40분에도 모스크바에서 자녀의 체류기간으로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어느 곳인지 알려달라는 문의전화가 걸려왔다.

중국의 상하이, 다롄, 칭타오 등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비영어권 나라이면서 상사원들이 많이 거주 하는 곳에는 S, S, H 등 한국의 유명 특례학원들과 자매결연을 한 입시학원들이 생겼다. 이곳 학원에서는 현지의 한국인들이 강사를 맡는다.

특례학원 관계자는 “공식적인 분원은 아니지만 이름을 빌려주고 서로 협조하는 관계”라며 “현지에서도 한국과 같은 교재, 비슷한 시간표를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입시정보와 교습 노하우를 주는 대신 그쪽에서는 학생들이 귀국할 때쯤 본국 학원으로 연결해 준다”고 말했다. 한국의 특례학원 홈페이지에는 외국학원 홈페이지가 링크돼 있다.

●특례에 ‘세미 특례’까지

L학원의 경우 선생님도 특례 출신이거나 미국에서 중·고교 및 대학을 나온 유학파가 8명이다. 일반 입시학원에서 학원강사 약력에 ‘서울대 졸’을 앞세우는 것처럼, 이 학원은 강사들이 ‘시카고대’ ‘럿거스대’ ‘UCLA대’ 등 미국 대학 출신임을 강조한다.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사람들을 뽑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게 학원측 설명이다.

최근 특례 전문 학원 수강생의 또 다른 일부를 차지하는 것은 유년 시절 외국에서 거주한 적이 있어 영어는 우수하지만 특례입학 자격이 안 되는 이른바 ‘세미 특례’ 학생들. 대학들이 영어 경시 대회 우수자나 토익 토플 성적 우수자를 영어 특기자 전형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꼭 특례가 아니더라도 장기인 ‘외국어 실력’을 활용할 방안을 찾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특례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특례에 앞서 시행되는 특기자 전형을 ‘전초전’ 삼아 준비한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토익이나 토플, 영문에세이 등 특기자 전형에 도움이 되는 테스트 잉글리시와 영어경시대회에 필요한 과목까지 가르친다.

L학원에서는 특기자 전형 입시철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에게 자녀의 토익 토플 성적표를 지참하고 들르게 한다. “‘××대 ××과’에 지원하실 분”이란 이름을 붙인 함을 만들고 그 안에 학부모들이 자녀의 성적표를 넣게 만든다. 함에 성적표가 쌓이면 강사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한다. 우선 학원 학부모들끼리라도 지원이 몰리는 것을 막자는 의도에서다.

특례 특기자 입시 전문강사 이동우씨(40)는 “서울대에서 2002학년도부터 특례생 지원자격을 ‘고교과정 1년 포함 5년 이상’으로 규정한 데 이어 다른 대학도 해외 체류 기간을 지금의 2∼3년에서 서울대 수준으로 늘릴지 모른다는 예측이 떠돈다”며 “앞으로 ‘영어 특기자 전형’의 경쟁도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정인성 기자 71j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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