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벤처의 그늘]쏟아지는 실업자…“스톡옵션 꿈 물거품”

  • 입력 2001년 11월 5일 18시 57분


무너진 벤처드림
무너진 벤처드림
거리에 ‘닷커머(.comer)’들이 넘쳐나고 있다. 한때 전 국민의 관심을 끌다시피 했던 벤처 열풍이 사그라지고 벤처 업계에 본격적인 한파가 몰아치면서 이 분야에 몸담았던 수많은 종사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벤처 실업의 실태와 근본 원인, 정부의 대책 등을 살펴봤다.

A씨(39)의 휴대전화는 오늘도 꺼져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한 게 벌써 1년.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1995년 S그룹 계열사의 고문 변호사로 들어가 일하다 지난해 초 벤처 열풍의 ‘막차’를 탔다.

▼닷커머들 줄줄이 거리로▼

연봉 1억원짜리 변호사로 남부러울 것 없던 삶이었지만 한참 잘나가던 인터넷 솔루션 업체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제의받자 주저 없이 옮긴 것. 전 재산을 털어 지분 투자를 하고 야심차게 새 인생을 시작했으나 불과 10개월 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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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20여명의 월급과 사무실 임대료, 운영 경비를 마련하느라 친인척들에게서 끌어다 쓴 급전만도 수억원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빚 독촉과 휴지조각이 돼 버린 주식뿐이다.

‘테헤란의 패잔병’들은 오늘도 거리를 헤맨다.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의 ‘대박’을 좇아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벤처로 뛰어든 ‘닷커머’들 중 상당수가 정보기술(IT) 분야의 거품이 빠지면서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언론사 기자로 일하다가 닷컴 열풍을 타고 지난해 인터넷 경매업체 전략기획실장으로 옮긴 K씨(33). 구조조정으로 8월 회사를 나온 그는 요즘 2주일에 한번씩 고용안정센터를 찾는다. 실직 후 6개월간 월 105만원씩 나오는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서다. K씨가 받았던 연봉은 4500만원. 새 직장을 찾고 있지만 K씨처럼 전문기술이 없는 사람을 받아줄 곳은 드물다.

서울 강남고용안정센터 정보기술(IT)담당 이상연(李尙鳶) 상담사는 “하루 10여명의 IT업계 종사자들이 찾고 있지만 대부분 1년 안팎의 경력인 데다 원하는 보수 수준과 맞는 업체가 없어 거의 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D화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다 한 인터넷 벤처회사 이사로 자리를 옮겼던 B씨(42)는 최근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스톡옵션에다 배 이상의 연봉 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겼지만 불과 1년 만에 회사의 위기로 이민을 결심한 것.

B씨와 함께 근무하다 최근 외국계 보험회사의 생활설계사로 새출발한 P씨(34)는 “이사님은 벤처로 옮기면서 함께 데려왔던 후배 직원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대기업에 돌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좌절됐다”고 말했다.

S그룹 계열사 과장으로 근무하다 벤처 열풍을 타고 인터넷TV 관련 업체로 갔던 L모씨(40)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올 4월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뒤 2개월 만에 다른 대기업으로 U턴했기 때문. 그는 “회사가 초기에 모집한 자본금으로 운영 경비를 쓰면서 근근이 버텨왔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사표를 냈다”며 “스톡옵션의 꿈과 성공에 대한 희망이 무너지면서 느낀 좌절감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벤처 열풍 이후 급증했던 정보처리학원들도 함께 된서리를 맞았다. 대부분 학원의 수강생이 1년 사이에 30∼40% 줄었으며 그나마 교육과정을 마친 수강생도 거의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넥서스정보처리학원 공도인(孔道仁) 원장은 “예전에는 학원에서 아는 기업을 접촉해 취업을 연결해 줬지만 요즘엔 그나마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IT 자격증을 갖고 학원과정까지 수료한 사람들도 취업이 안된다”고 말했다.

▼‘메카’ 테헤란로 썰렁▼

이 같은 분위기 탓에 ‘벤처기업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는 요즘 썰렁하기 그지없다. 강남구 역삼동 대한공인중개사 장세혁(張世爀) 사장은 “사무실을 찾는 문의가 올 초만 해도 하루 10여건씩 있었지만 최근엔 2, 3건에 불과하다”며 “건물 공실률이 15∼20%나 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용규(朴龍奎) 박사는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체에서 쏟아져 나온 실업자를 흡수하기 위한 대안으로 질적인 측면은 무시한 채 벤처 수 늘리기에만 집착했다”며 “이제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IT 분야의 인력 수급 정책을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훈·최호원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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