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N세대 '경박단소' 바람

  • 입력 2001년 8월 19일 18시 39분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 풍조’

‘절라 유쾌 사랑 이야기’라는 N세대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개봉 6일 만에 전국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신라의 달밤’은 개봉 두 달 만에 전국 관객 400만명을 넘기며 롱런 중이다.

연중 최대 격전지라는 여름 시즌 한가운데 뛰어들어 내로라 할 만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쾌속 질주하고 있는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과장되고 유치하고 억지 같은 ‘꼬집기와 비틀기’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발랄함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박수를 보낸다. 두 영화를 모두 보았다는 회사원 허영아씨(27·서울 서초구 방배동)는 “묵직한 문제 의식이나 할리우드류의 물량공세식 화려함은 없지만 그냥 맘 편하게 앉아서 깔깔거릴 수 있어 좋았다”며 “비눗방울처럼 가벼움을 좋아하는 신세대 취향을 그대로 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진지한 사람, 무거운 대화나 읽을거리도 신세대에게는 인기가 없다. 그들은 딱딱하고 무거운 이야기도 한없이 가벼운 것으로 비틀어 버린다. 경박단소를 지향하는 N세대의 취향이다.

배우자를 고르는 데서도 신세대는 사려 깊고 진지한 사람보다는 밝고 쾌활한 사람을 좋아한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지난해 미혼 남녀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상적 배우자의 성격으로 ‘밝고 쾌활한 성격’(36%)을 꼽은 사람이 ‘과묵하고 진지한 성격’(5.5%), ‘이성적이고 지적인 성격’(3.5%)을 선택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혼정보회사 선우(대표 이웅진)의 커플매니저인 김지현(金志炫·31·여)씨는 “직업 외모 면에서 무난한 남성 회원들이 ‘재미없다’는 이유만으로 맞선을 볼 때마다 퇴짜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며 “요즘 젊은 여성들에겐 재미없고 말수 적은 남성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 못지않게 기피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학 역사 철학 관련 과목들은 정원을 채우기도 힘들다. ‘한국고전문장의 이해’ ‘동서양의 고전’ ‘동양사의 이해’ ‘사회주의 정치와 경제’ 같은 강좌들은 수강 신청한 학생 수가 과목 정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한마디로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것.

신세대가 즐겨 읽는 책도 가벼운 대중소설이 주류를 이룬다.

지난달 24일 교수신문이 발표한 고려대 부산대 서울대 전북대 충남대 한양대 등 전국 6개 대학도서관의 올 상반기 도서대출 순위조사 결과에 따르면 판타지 무협소설 등이 상위 10위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J대의 경우 올 상반기 최다 대출도서 10권 중 9권이 ‘묵향’ ‘성검전설’ ‘드래곤 라자’ 등의 판타지 또는 무협소설류로 나타났다.

존경의 대상인 역사적 인물도 가볍게 희화화된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걸어나와 인터넷 게임을 하며 ‘유쾌 상쾌 통쾌’를 외치는 한 통신업체의 광고는 가벼운 것에 환호하는 젊은 네티즌들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문화평론가 박광택(朴光澤·49)씨는 “바야흐로 소비의 중심이 신세대로 옮겨가면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해 취향에 맞춰 가는 게 마케팅의 중요한 흐름이 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우리 사회는 역사인식이나 이념과 같은 묵직한 이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져 가고 있는 데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지상주의로 분위기가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며 “여기에 정치권 등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순간적인 가벼움으로 도피해 보자는 심리를 부추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기득기자>rati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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