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살인' 무기수 아들의 사부곡

  • 입력 2001년 6월 24일 19시 01분


“아들아, 너에게 마지막으로 진실을 물려주고 죽고 싶다.”

“아버지, 어차피 하느님이 다 아는 진실입니다. 아버지가 오래 사시는 것이 저에게 물려주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1972년 ‘춘천 초등학생 강간살인 사건’의 무기수 정진석씨(67·가명). 정씨는 최근 아들(38)에게서 편지지 7장 분량의 긴 편지를 받았다. 정씨는 지난달 아들과 30년 만에 화해를 했다.

<본보 5월 21일자 A31면 보도>

편지는 본보 보도를 통해 아버지의 유서내용을 알게 된 아들이 아버지 없이 지내온 30년을 회고하며 쓴 것. 정씨는 미리 작성한 유서에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재는 강물에 뿌려 물을 더럽히지 말고 거름이나 되도록 산에 뿌려달라”며 “죽기 전에 누명을 벗어 진실을 물려주고 싶다”고 적었었다.

72년 사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은 강간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이 자신이 쓰던 연필이라고 진술해 아버지의 유죄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연을 고백했다.

“당시 형사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나를 지서로 끌고 가 며칠씩 잠도 안 재우고 몰아붙이면서 ‘이 연필이 네 것이냐’고 해서 얼떨결에 ‘맞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이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만드는 결정적 증거가 됐습니다.”

정씨 구속 이후 아들은 고향 춘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서울 할머니댁으로 이사했다. 아들은 씨름부 주장으로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는 등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서울 K중학교 2학년 때 단체로 관람한 영화가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고 아들은 고백했다. 영화는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은 선천부사였던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도 모르고 홍경래의 난을 막지 못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나중에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며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책가방을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다 폭력세계로 빠져들어 젊은 시절 허송세월을 했다고 말했다. 아들은 지난 세월에 대한 참회와 함께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들은 현재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아버지의 재심을 돕고 있다.

한편 정씨의 재심청구 사건 사전심문 2차 공판은 25일 서울고법에서 열린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