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실업亂' 오나…위기론속 부도 잇따라

  • 입력 2000년 9월 28일 18시 49분


6월 자신이 다니던 벤처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은 박모씨(28). 벌써 4개월째 실직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을 ‘실업자’로 부르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내 자신을 실업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새로운 일자리를 곧 얻을 계획이고 또 성공할 자신도 있습니다.”

지난해 말 벤처 열풍이 한창일 때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벤처에 뛰어들었던 박씨는 다시 대기업에 입사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죽으나 사나 벤처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

실직상태가 불안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박씨는 “잠깐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대기업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안정적인 삶’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벤처실업자〓‘닷컴 위기론’ ‘벤처 대란설’ 등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벤처업계에서는 박씨와 같은 ‘벤처 실업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닷컴 위기론이나 벤처 대란설은 이익을 내지 못하는 인터넷 기업이나 수익 없이 운영되는 벤처기업 등이 조만간 대폭 정리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서 나오는 얘기.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98년 하반기 벤처기업으로 등록했으나 유효기간이 지나 올 상반기에 벤처기업 등록을 경신해야 했던 1192개의 회사 중 절반이 넘는 642개 회사가 재등록을 포기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망했거나 업종을 바꿨기 때문이다.

경쟁력 없는 벤처회사들의 퇴출이 가속화되고 벤처업계의 일자리가 크게 줄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최대의 ‘화이트칼라 실업군(群)’이 생길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예측들이다.

▽벤처실업자의 특징과 대책〓벤처 실업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를 ‘실업자’로 생각하지 않는 점. 한 인터넷 방송국에서 일하다 지난달 그만둔 강모씨(29)의 말. “벤처가 수천개인데 일자리 하나 없겠어요? 그리고 정 일자리가 없으면 직접 창업하면 되죠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벤처기업 경영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웹디자이너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등 전문 기술인이라면 모르겠지만 기획이나 경영관리 전반 등을 두루뭉술하게 맡고 있는 대기업 출신 인력들의 재취업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디지털 저작권 보호 전문업체인 ㈜마크애미의 최종욱(崔鍾昱)사장은 “요즘 벤처경영자들은 벤처 열풍이 불던 지난해 말과는 달리 사람을 뽑을 때 전문성과 능력을 철저히 검증한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국제대학원 양유석(梁裕錫·경영학)교수는 “닷컴 위기론이 현실화되면 지금의 벤처 인력 중 제대로 대접받으며 재취업할 수 있는 인력은 10%도 안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며 “벤처실업 인력을 다시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완배·최호원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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