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 또 '겸직' 공정성 논란

  • 입력 2000년 9월 27일 23시 15분


금융감독기관의 고위간부가 감독을 받아야할 은행의 사외이사를 겸임하고, 정부로부터 은행평가를 위임받은 현직 교수가 시중은행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사실이 밝혀져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금융감독원 한문수 상임고문은 올 3월부터 국민은행의 사외이사직을 맡았다고 한나라당의 엄호성(嚴虎聲)의원이 27일 주장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날 이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또 25일 은행경영평가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된 서강대 김병주(金秉柱)교수가 지난해 2월부터 신한은행 사외이사를 맡아 온 것으로 확인됐다.

은행위원회는 2차 금융구조조정을 앞두고 시중은행이 이달 말까지 제출할 자구계획안을 평가해 금융지주회사 편입 등 은행의 사활을 사실상 결정하는 기구다. 따라서 위원장의 시중은행 사외이사 겸직문제는 공정성 시비를 부를 수밖에 없다.

자민련 안대륜(安大崙)의원은 이날 오전 “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인 서울대 곽수일(郭秀一)교수와 같은 위원회 위원인 이화여대 이기호(李基浩)교수가 각각 IMT―2000 사업의 사업자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은 LG전자와 한국통신의 사외이사로 재직해 왔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엄의원은 또 “광주은행에서 2000억원대의 대출을 받은 금호그룹의 박정구(朴定求)회장이 광주은행의 사외이사”라며 사외이사의 근본취지가 퇴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서강대 국찬표(鞠燦杓)교수 등 금감위 비상임위원 3명이 삼성엔지니어링 등 재벌계열사의 사외이사직을 맡은 사실이 알려지자 26일 사외이사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지도층의 ‘무신경’〓현재까지 겸직 전문가가 정부기구에서 개별기업의 이익을 위해 영향을 미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의결 및 자문과정에서 재계의 입장이 보이지 않게 전달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참여연대 장하성(張夏成)교수는 “금감위―시중은행, 통신위―통신사업자의 경우와 같이 정부기구와 관련 기업에 겸직하는 상황은 말도 안된다”고 지적했다.

정부기구 비상임위원 A씨는 ‘사외이사 겸직’에서 드러난 사회 지도층의 무신경을 꼬집었다. A씨는 “나도 사외이사 자리를 여러 차례 제의 받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금감위 산하 비상임위원인 B씨는 “지난해 5월 임명 당시 한 은행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는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올 2월 자진해 물러났다”며 ‘겸직의 심각성’을 시인했다.

▽엄밀히 구분돼야〓일각에서는 그러나 △법규정을 어기지 않았고 △전문성을 갖추고 재벌오너의 입김도 떨칠 수 있으며 △사외이사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물러날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장교수나 연세대 김준기교수는 “금감위―제조업체의 경우처럼 직접 감독대상이 아니라면 사외이사 겸직 자체가 문제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교수는 “미국에선 리큐절(recusal)제도에 따라 당사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겸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중은행 상무인 C씨도 “공직자의 윤리수준을 법조문에 국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C씨는 “김교수 등이 ‘규정 조문’은 어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한국처럼 재벌이 비정상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규정의 취지’를 어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김병주교수는 “신한은행은 평가대상이 아니며 문제가 된다면 2, 3개월간 사외이사직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말했다.

<김승련·이나연기자>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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