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지키는 서울대의대 이중선교수 속앓이]

  • 입력 2000년 6월 21일 18시 54분


후배와 제자들이 떠난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 서울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이중의(李重宜·41)교수. 경각을 다투는 중환자만 다루던 10여년 경력의 이 노련한 응급의는 20일 오전 9시부터 24시간 응급실을 지키며 감기부터 뇌졸중 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루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변신했다.

환자들에게 짜증 한번 내는 일 없는 이교수에게 기자가 “‘의사〓불친절’의 편견을 깨줬다”고 말을 건네자 “오늘처럼 한가하게(?) 환자를 볼 수 있다면 어느 의사도 천사가 되지 않을 리 없다”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피곤하고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약분업이 어제오늘 얘기도 아니고 이미 합의까지 이뤄졌던 사항인데 막상 시행을 목전에 두고 의사들의 문제제기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것. 민감한 시기에 ‘개인적인 의견’을 얘기하기 어렵다는 그를 설득했다.

“‘임의조제냐 대체조제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의약분업의 당위성에 찬성하는 의사들조차 집단폐업과 사표에 동조하는 사태를 주목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이제 벼랑끝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의약분업은 울고 싶은 의사들 뺨을 때린 격이지요.”

이교수는 현재 한국의 의료구조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요구하는 이중구조라고 지적한다.

그는 8년 전 온 몸을 난자당해 실려온 조직폭력배 1명을 7시간에 걸쳐 수술한 적이 있다. 그때 받은 돈이 5만원. 지금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맹장염 수술도 준비부터 청소까지 환자 1인당 최소 2시간이 걸리고 의사 3명과 간호사 2명이 붙는데 의료수가는 17만원. 또 초진료 7400원, 재진료 3700원인 현실에서 병원수지를 맞추려면 한달에 적어도 200명 이상의 환자를 봐야 하고 휴가도 반납해야 할 정도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이 수지의 ‘빈틈’을 메우는 방법은 약값밖에 없다는 얘기다. 되도록 많은 약을 사용하고 값을 높게 책정해야 손실이 메워진다는 것. 요즘은 이것이 ‘수지타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라고 이교수는 설명했다.

“의대의 여자 졸업생들은 취직할 곳이 없어 시집이나 가고, 월급 100만원이라도 주면 노느니 일하겠다는 전문의들이 양산되는 상황에서 구조적 문제를 고치지 않고 시행되는 의약분업에 어느 의사가 선뜻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의사들이 돈을 많이 벌지 않았느냐’ ‘의사가 너무 돈을 바라는 것 아니냐’는 반론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의사들에게 성인(聖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건 곤란하지요. 70년대 말 학교를 졸업할 때 내 앞엔 두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사기꾼이 돼 돈다발을 쫓을 것이냐, 아니면 최소한 양심을 지키며 가난하게 살 것이냐. 적어도 돈만 생각하고 의사 일을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의사에게 이타성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너무 진을 빼놓습니다.”

그는 차제에 “의료제도를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는 미국식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정부재정을 쏟아 부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럽식으로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며 의약분업도 실행의 당위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정부와 의료계가 함께 책임을 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어렵사리 밝혔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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