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포커스]「귀빈」모시기 실상

  • 입력 1999년 8월 31일 19시 42분


【어느 사회에나 VIP는 있다. VIP란 말 그대로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지위와 명예 권위 부를 골고루 갖추고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존중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VIP는 경제적 의미의 상류층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서울대 사회학과 홍두승(홍두승)교수는 “VIP는 엄밀한 개념이 아니라 대접하는 쪽에서 대접받는 사람에 대해 내리는 일종의 사회적 평가”라고 말했다.

일단 VIP로 인정되면 유무형의 많은 혜택을 제공받지만 일부에서는 “VIP는 있어도 VIP문화는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VIP고객을 선정해 각 기업의 마케팅팀에 제공하는 서울다이렉트사의 김기영(김기영)사장은 “장차관 국회의원 재벌친인척과 대기업임원, 중견급 전문직업인 등을 VIP로 꼽을 수 있다”며 그 수를 약 5만명으로 추산했다. 누구나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VIP. 우리사회에서 과연 누가 VIP이며 어디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살펴봤다.】

◇전천후 VIP장관

K씨는 지난해 취임하자마자 국내 특급호텔 2곳에서 선물을 받았다. 호텔 고급식당의 명예 멤버십카드였다. 비행기를 타도 좌석은 늘 2A(앞에서 두번째 창문쪽 자리)가 배정됐다. 회원권은 없지만 어느 골프장에서든 원하는 시간에 부킹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최고 대우를 받는 ‘전천후 VIP’에는 전현직 3부요인(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과 장관, 중진급 국회의원, 재벌총수와 대기업사장, 주요 언론사사장 등이 있다.

전천후 VIP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 의전서열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곳은 공항.

국제선 청사 3층 귀빈실은 전현직 3부요인과 헌법재판소장, 교섭단체 정당대표 만이 이용할 수 있다. 이들은 출입국검사장을 거치지 않고 전용통로로 비행기에 오른다. 공항관리공단과 항공사 직원이 출입국 수속을 대행해주며 기내 좌석까지 깍듯이 모신다.

장관과 국회의원은 영접실을 이용할 수 있지만 탑승때는 일반인과 같이 출입국검사장을 통과해야 한다.

항공사 의전전담팀(MAS)은 VIP의 여행스케줄을 최소한 출국 하루 전에 체크한다. 대한항공 조규황(曺圭晃)차장은 “VIP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는 탑승절차를 ‘물 흐르듯이’ 안내하고 좋은 자리를 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H그룹 회장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뛰듯이 움직이기 때문에 MAS 직원들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여객기의 좌석서열은 두번째줄 왼쪽(2A), 그 반대쪽 창가 자리, 세번째줄 왼쪽 창가, 그 반대쪽 창가 순. 등급이 비슷한 VIP가 여러명이 함께 탈 경우 ‘2A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VIP가 일반석을 예약했을 경우 항공사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주기도 한다.

◇업종별 VIP

건설교통부 국장이 공항에서는 VIP 대우를 받는다. 국회 건교위 소속 국회의원도 다른 의원보다 한 단계 높은 예우를 받는다.

고급호텔에서는 장관급이 아니면 VIP대접 받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서울의 S호텔 관계자는 “우리 호텔에 들르는 VIP 고객중 3부요인 장관 대기업사장 언론사사장 실세 국회의원 등은 매일 아침 총지배인에게 보고된다”고 말한다.

이 호텔 식당 뒷벽에는 장관과 대기업 사장의 얼굴사진이 붙어있다. 직원들이 VIP를 알아보지 못하는 결례를 예방하자는 것.

호텔 피트니스클럽과 멤버십식당은 돈만 있다고 회원으로 받아주지는 않는다. 호텔 이사회나 기존회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멤버가 될 수 있다. 병원의 VIP 대우는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것. S병원측은 “장차관 국회의원 대기업사장급이 오면 의사의 출퇴근 시간을 변경해서라도 편의를 봐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10∼30% ‘예우할인’을 해주는 곳도 있다. 그러나 병원은 담당의사가 “NO”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기다려야 하지만 의사와 친분이 있으면 일반인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 특징. 보건복지부 간부는 병원이 특별히 모시는 VIP다.

VIP는 죽어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일부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 위독한 VIP가 있으면 미리 영안실을 확보해 놓기도 한다. 골프장에서는 소재지의 자치단체장과 부장급 이상 판검사 등이 VIP 대우를 받는다. 골프장 운영에 직접 영향을 주는 한국전력 한국통신 국세청 등의 간부는 웬만한 국회의원보다 더 대우를 받는다. 골프장을 관내에 두고있는 파출소장도 무시할 수 없는 ‘골프장 VIP’.

대기업이 운영하는 모 골프장의 경우 유명인사가 비록 한직에 있더라도 ‘가능성있는 인물’이면 VIP명단에 올려놓고 관리한다. 그러나 L모 전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며칠 안돼 이 골프장으로부터 ‘회원조정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아 권력무상을 실감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의 VIP는 ‘돈많은 사람’. 재벌총수의 신용카드 사용은 예금 잔고나 결제 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승인이 떨어지도록 조치하는 게 관례.

결혼시장에서는 VIP가 대물림되기도 한다. 결혼정보회사 ㈜선우가 밝힌 VIP배우자의 조건은 ‘명문대 출신에 주택과 중형차를 소유한 연봉 4000만원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이면서 부모가 명문대 교수, 고위공무원, 대기업임원이거나 고소득 전문직일 것’.

◇VIP문화가 없다

정부 행사가 다가오면 행자부 의전실에는 자리배치를 묻는 전화가 쇄도한다고 한 관계자는 푸념했다. 심지어 “단하에 배치되면 참석하지 않겠다”거나 행사후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자리에 앉혔느냐”며 호통치는 인물도 있다는 것. 특히 권력주변 인사들은 오만하거나 거드럼을 피우고 체면치레가 심하다고 한다.

VIP대접만 요구하고 거기에 따르는 품위와 교양, 겸손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VIP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강남의 유명 호텔 직원은 “피트니스클럽 회원 모집에서 탈락한 스타급 연예인이 ‘나는 VIP가 아니란 말이냐. 고소하겠다’며 거세게 항의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VIP는 손가방도 직접 들고 농담도 곧잘 건네는 데 비해 우리나라 VIP는 권위적인 편”이라고 지적했다. 격식을 중시해 말을 건네기도 힘든데다 조금이라도 예우에 소홀하면 불쾌해 한다는 것.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국회의원과 단체장, 지방의회의장 간에 의전문제로 갈등이 빈번하자 몇몇 국회의원은 행자부에 “국회의원 예우에 관한 지침을 만들어 지방에 내려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윤종구 기자

이철용 기자

부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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