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검찰(中)/파동 전말]청와대 지나친 개입

  • 입력 1999년 2월 3일 19시 29분


검사들이 검찰총장의 퇴진을 요구한 사상 초유의 ‘검찰파동’은 2일 대검에서 열린 ‘전국 지검 차장검사 및 평검사회의’를 계기로 일단 잦아들고 있다.

이번 파동의 전말을 곰곰 들여다 보면 이종기(李宗基)변호사 수임비리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언론보도와 여론을 의식한 지나친 관심과 개입이 사태의 도화선이 된 측면이 적지않다.

검찰 수뇌부는 지난달 초 이변호사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이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물론 사건의 진앙지인 대전지검이 수사를 맡았다.

그러나 청와대의 발언이 나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청와대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강조했다. 검찰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검찰은 대검 이원성(李源性)차장검사를 수사책임자로 임명하고 대검 수사팀을 대전으로 급파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다.

그동안 검찰의 독립을 강조하며 개별 사건에 가급적 언급을 피해오던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엄정 수사를 촉구한데는 숨은 사연이 있다. 지난해 의정부 이순호(李順浩)변호사사건을 보고받은 청와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돈을 받은 판사들을 사법처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기류를 전해들은 법원은 난감했다. 사상 처음으로 현직 판사가 비리혐의로 법정에 설 경우 사법부의 권위가 무너질 것이 뻔했다. 법정에 선 피고 원고가 모두 판사를 불신, 사법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대법원은 고위 관계자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이같은 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이 관계자는 김대통령을 면담했지만 시원스러운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박상천(朴相千)법무부장관은 김대통령에게 외국에서는 판검사의 비리 혐의가 발견되더라도 중죄가 아닌한 법의 권위를 위해 관대하게 처리하는 사례가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정부 이변호사 사건에 연루된 판검사들은 자체 징계를 받거나 사표를 쓰는 선에서‘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또다시 유사한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의 입장은 강경했다. 판검사의 떡값이나 전별금 수수같은 ‘구시대적’ 관행이 오늘날의 국민 감정에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한 배경도 있었다는 얘기다.

청와대가 팔을 걷어붙이자 검찰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검찰은 청와대의 관심에 상응하는 ‘거물’을 희생양으로 삼는 등 강경 수순을 밟지 않을수 없었다.

검찰의 ‘빨리 빨리’수사는 여러가지 ‘무리수’를 낳았다. 이변호사의 입을 빌려 비리 혐의자를 정하고 이 혐의자로부터 자백을 받는 방식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수사로 비리 혐의 당사자의 수긍을 얻기는 힘들었다. 그바람에 평검사들이 건의서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전별금과 떡값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일부 검사들만을 단죄하려 했던 수뇌부의 태도로 인해 수사대상이 되지않은 검사들은 비굴한 안도감을 느끼게 해 검찰 조직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내부 인심을 잃고 말았다.

이때 심재륜(沈在淪)대구고검장이 수사에 반발하며 검찰의 ‘정치 시녀화’라는 ‘뇌관’을 건드리고 나섰고 수사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평검사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검사들 스스로도 떳떳하다고 말할수 없는 떡값 관행보다는 ‘정치적 중립화’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평소 검찰권 행사를 곱지않게 바라보던 내부여론도 여기에 가세했다.

청와대는 이제 이 문제를 ‘통치권’ 차원에서 해석했다. 옳은 요구라도 항명식 분출방식을 받아들이면 사회 각 분야에서 반개혁 저항세력을 다스릴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는 얘기다.

‘검찰파동’은 이제 미봉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청와대가 그쪽의 잣대로 검찰의 고유 판단에 너무 앞질러 대응함으로써 미증유의 ‘검난(檢亂)’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하준우기자〉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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