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자들의 현주소]『재취업 퇴짜…가족들은 짜증만』

  • 입력 1997년 11월 4일 20시 15분


감원 삭풍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직장인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은 절박한 「생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올초 중견그룹의 차장에서 명예퇴직한 K씨(41). 지금은 치킨집의 주인으로 변신해 있다. 그는 『지난 열달간 하루도 편하게 발뻗고 잔 날이 없다』고 말한다. 회사측으로부터 「정리대상」 통보를 받고 직장을 나올 때만 해도 『차라리 잘 됐다. 속 편하게 장사나 하고 살자』는 호기가 있었다.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받은 1억여원에 빚을 내 조그만 호프집을 차렸다. 「남의 돈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인과 함께 새벽 2시까지 가게를 지켰다. 하지만 3천만원의 손해를 보고 손을 들었다. 「재기」에 나서 치킨점을 차린지 석달째인 지금은 한달에 3백만원 가량의 순이익을 올려 웬만큼 안정을 찾은 상태. 그러나 스트레스성 위염이 생겼고 가끔 울적한 기분에 젖는다. 『내가 닭고기나 튀기려고 대학까지 나왔나 싶을 때가 많아요.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회사원들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지난 3월 삼미특수강이 부도를 낸 뒤 4월에 감원 해고된 J씨(47·부산 해운대구)는 반년째 재취업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아직 실업자 신세. 철강회사 서너군데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나이가 많아 월급은 많이 줘야 하는데 업무효율은 떨어진다』는 반응들이었다. 하루종일 깨알같은 글씨의 구인정보지를 들여다보지만 행간 어디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지 못했다. 김밥체인점이라도 해볼까 하고 창업박람회를 찾아다니고 창업 정보지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문제는 자금.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1억원쯤 되는 퇴직금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흐리고 비오는 날」에 대비하지 않고 「평생 직장」만 믿고 살아온 자신이 후회스럽다. 지금은 적금을 해약해 생계를 잇고 있지만 그나마 내년초에는 바닥이 난다. 처음에는 위로해주던 가족들도 이젠 짜증을 내는 눈치다. 기아자동차에 근무했던 P씨(31)는 현재 동양제과로 옮겨 사원 연수를 받는 중이다. 기아에서 완성차 수출을 담당했던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생산품인 자동차 수출을 담당한다는 긍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대리 진급을 눈앞에 두었던 지난 7월 회사의 부도유예협약 신청으로 그의 자부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감원설」이 나돌자 그는 고민 끝에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회사를 살리려고 애쓰는 동료들에겐 죄스러웠지만 「아내와 두달 된 아들을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금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마치 신입사원 같은 자세로 출근하는 K씨는 『새 직장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영이·이 진·이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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