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다중’…포스트포드주의 시대

  • 입력 2004년 10월 15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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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파올로 비르노 지음 김상운 옮김/296쪽 1만2000원 갈무리

이 책은 이탈리아 신좌파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인 파올로 비르노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주체로 설정한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에 대한 세미나의 기록물이다. 다중은 누구인가. 비르노의 동료이자 ‘제국’의 저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다중은 민중 또는 대중의 대체적 개념이다.

다중이란 개념의 연원은 매우 깊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다중은, ‘다수’라는 수 또는 양적인 개념과 관련해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개념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그 자체로 영구히 존속하는 다원성(또는 복수성)을 다중이란 개념으로 풀어 냈다. 그에게 다중의 다원성은 일시적이거나 중간적 형태가 아니라 영구적 형태였으며 시민자유의 주춧돌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영국의 철학자 홉스에게 다중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독점 형태로서 국가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무질서 상태를 의미했다. 반면 국가가 등장한 뒤 국가의 주체가 곧 민중이었다. 민중은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지니고 또한 하나의 단일한 의지가 귀속되는 것”인 반면, 다중은 “국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시민”을 지칭했다.

근대국가 형성에서 국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민중이 다중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다른 형태인 대중을 등장시킨 포드주의의 일괄 생산양식이 종말을 맞고 다원성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를 맞으면서 다중은 부활했다.

오늘날 생산의 자원은 유형자산이 아니라 지식과 지각, 언어적 의사소통에 기반한 상호성을 강조한다. 포드주의 시대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표어가 “지금은 근무 중. 조용히 하시오”였다면 오늘날의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표어는 “지금은 근무 중이므로 얘기를 하시오”다.

저자는 민중의 범주로 포착하기 힘든 다중의 다양한 존재양식, 즉 언어와 유희를 탐구하기 위해 인류학, 언어철학, 정치경제학을 불러들인다. 편의주의와 냉소주의 등 오늘날의 감수성을 지배하는 배경을 탐구하면서 푸코의 미시적 정치권력 구조 연구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개념까지 파고든다.

다중 개념이 등장한 배경에는 이탈리아 노동자주의의 탈(脫)마르크스화가 놓여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 삶의 규정적 요소로 보고 노동자를 노동에서 소외시키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노동자주의는 오히려 삶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노동자를 소외시킨다고 주장한다. ‘노동으로의 자유’가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자유’라는 개념에서 다중의 개념이 재탄생했다는 점은 ‘혁명의 시대’에서 ‘일상의 시대’로 전환된 문명사적 변화를 읽게 해 준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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