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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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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후예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5〉](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2/02/123361345.7.jpg)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
![어느 날[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4〉](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1/26/123252029.3.jpg)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김상옥(1920∼2004)1970년대에 발표된 초정 김상옥 시인의 시조 한 편이다. 짧고도 간결한 삼행시라 읽기 매끄럽다. 내용상 이 작품은 하나도 슬플 것이 없다. 새…
![돌베개의 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3〉](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1/19/123139061.3.jpg)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
![엄마는 환자, 나는 중환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2〉](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1/12/123026007.3.jpg)
엄마는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중략)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 놓던 장마가 지나갔다 새로 이사 간 집 천장에 곰팡이가 새어 나오듯 석 달 만에 작은 혹이 주먹보다 더 커졌다 착한 암이라고 했는데 악성 종양이었다 엄마는 일주일 동안 구토 증상을 겪었지만 나는 아…
![1월 1일[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1〉](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1/05/122921592.3.jpg)
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몸을 풀고 싶다고 환하게 웃으며 왔다 어제 떠난 사람의 혼령 같은 새 사람이 왔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얼굴은 차차 익혀나가기로 하고 다 들이었다…
![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30〉](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2/29/122831769.5.jpg)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하략) ―김…
![겨울 강가에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9〉](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2/22/122748307.5.jpg)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
![높새가 불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8〉](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2/15/122646685.5.jpg)
높새가 불면 /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에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 지팡이 짚고 짚풀을 삼어 /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 슬프고 고요한 /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 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 그리고 산술도 / 다 잊어버리고 백화를 깎아 /…
![다정도 병인 양[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7〉](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2/08/122548752.3.jpg)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
![밥풀[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6〉](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2/01/122446549.3.jpg)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 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낙엽송[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5〉](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1/24/122341697.3.jpg)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저것들은나무의 내장들이다어머니의 손끝을 거쳐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딸들의 저 인생 좀 봐어머니가 푹푹 끓이던속 터진내장들이다―신달자(1943∼ )
![가을의 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4〉](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1/17/122236926.3.jpg)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
![상한 영혼을 위하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3〉](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1/10/122123299.5.jpg)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
![무화과 숲[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2〉](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1/03/122012072.5.jpg)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1988∼)한눈에 반할 때가 있다. 처음 본 그 순간에 결정된다. 마음…
![화남풍경[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1〉](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3/10/27/121901840.5.jpg)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