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뜨렸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그의 서거 10주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이날이면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하는 많은 국민들이 전국을 노란 물결로 뒤덮는다. 특히 올해는 서거 10주기를 맞이한 만큼 그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인다.
하지만 올해는 슬픔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노무현 정신’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별명은 ‘바보 노무현’.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병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우며 ‘어려운 길’을 선택한 그에게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에 힘입어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13대 국회에 입성한 노 전 대통령은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을 정치인으로 인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을 택해 14대 선거에서 동구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냈지만 낙선했다.
1995년 열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37.58% 득표에 그쳐 지역주의 벽을 실감하며 낙선했다. 또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이명박, 이종찬 등에 밀려 또다시 낙선했다.
1997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으로 치러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나서 당선되며 6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00년 4월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우며 다시 부산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가족과 보좌관 등 모두가 ‘부산행’을 말렸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은 선거초반 여론조사에서 앞서나가며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주의 벽에 다시 한번 가로막히며 35.69%의 득표율로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53.22%)에게 패했다. 당시 선거에서 허 후보의 집요한 색깔론과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발언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다.
노 전 대통령은 ‘낙선’이란 결과에도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며 지역주민들의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이런 그를 국민들은 ‘바보’라고 불렀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별명을 가장 좋아했다. 지역주의 극복이 정치인 노무현의 첫번째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대통령 당선 당시에도 지역주의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극복하지 못한 과제였다. 당시 그의 PK지역 득표율은 부산(29.85%), 울산(35.27%), 경남(27.08%)에 불과했다. 경남 김해 출신인데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노동자를 대변했던 그로서는 매우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들 것 같았던 그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했다.
지난 제20대 총선 때 부산지역 18곳의 선거구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은 5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며 3당 합당 이후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제19대 때의 2명(조경태·문재인-민주통합당)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인 셈이다.
경남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이 있는 김해 갑/을 2곳과 양산을 등 3곳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고, 창원성산에서는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당선되며 견고하기만 하던 지역주의가 서서히 균열하기 시작했다. 제19대에서는 민홍철 민주통합당 의원(김해갑) 1명뿐이었다.
울산에서도 제19대 때 새누리당이 6석을 싹쓸이 했지만 20대에서는 새누리당과 무소속이 3석씩 차지하며 지역주의 균열을 알렸다.
보수의 아성으로 불리는 대구에서는 두 번의 낙선 끝에 김부겸 민주당 의원이 20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파란을 일으켰다. 호남에서도 국민의당이 선전하며 제3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변화는 속도를 더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과 울산에서 비(非)보수 정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경남에서는 문 대통령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0.51%P 차이로 석패했지만 홍 후보가 직전 경남도지사 출신인 점을 고려할 때 사실상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PK의 지역주의는 사실상 종식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PK의 경우 부산(오거돈), 경남(김경수), 울산(송철호) 등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이 모두 당선됐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에서는 기초단체장 16명 가운데 13명, 광역의원 47명 중 41명이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돼 ‘보수붕괴’란 분석이 쏟아졌다.
경북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 고향인 구미에서 민주당 소속 장세용 시장이 당선되면서 과거의 일당 독점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PK지역 광역단체장은 모두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어 그 의미를 더 했다.
오거돈 부산시장은 참여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으로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송철호 시장은 노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지역에서 ‘인권 변호사 3인방’으로 불리며 ‘지역주의 극복’에 앞장선 인물이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인사들이 노무현의 꿈, ‘지역주의 극복’의 선봉에 선 것이다.
다만, 지역주의 극복이란 과제는 지금도 ‘진행중’이란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여전히 대구·경북에서 보수정당이 절대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고, 호남에서도 특정 정당이 지방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민주평화당이, 강원도에서는 민주당 광역자치단체장과 보수정치권 국회의원·기초단체장이 공존하며 희망을 엿보게 한다.
지역주의의 한계를 상당히 극복한 지금, 관심은 1년도 채 남지 않은 2020년 4.15 총선에 모아진다. 내년 총선은 그 어느때보다 경쟁이 치열할 것이란 평가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각 정당은 모두 ‘지역발전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과거 콧대 높던 정치인이 아닌 치열한 경쟁 속 낮은 자세로 임하는 지역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외친 ‘지역주의 극복’이 정치적 수사가 아닌 국민과 국가 발전을 위한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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