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피하려 스테가노그래피 만들어 北지령 받아… ‘왕재산’ 간첩활동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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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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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파일(왼쪽)에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으로 숨긴 북한지령문을 프로그램을 이용해 평문으로 추출한 것(오른쪽). 서울중앙지검 제공

북한 지령으로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로 공안당국에 적발된 종북(從北) 성향 지하당 조직 ‘왕재산’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첨단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을 썼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비밀 메시지를 신문기사나 그림, MP3파일 같은 위장 정보 안에 숨겨 메시지 내용뿐만 아니라 존재까지도 숨기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이다.

검찰이 ‘왕재산’ 총책 김 씨로부터 압수한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에는 수상한 문서가 가득했다. 확장자명이 .doc인 평범한 문서파일을 열면 최근 본 듯한 신문 기사가 뜬다. 유럽에서 발생한 슈퍼 박테리아나 만성위염 예방법 따위에 대한 평범한 기사다. 하지만 북한 공작조직이 직접 개발한 특수 프로그램을 실행해 암호문을 보통 문장으로 바꾸면 ‘관덕봉 동지 앞’으로 시작하는 북한의 지령문이 뜬다. 거꾸로 북한에 보고문을 보낼 때에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메시지를 암호화하면 신문 기사로 위장한 스테가노그래피를 만들 수 있다. 검찰은 압수한 김 씨의 USB메모리에서 스테가노그래피로 만든 문서 40여 개를 찾았다. 김 씨 등 왕재산 조직원들은 수사기관이 추적하지 못하도록 G메일 등 해외에 서버를 둔 e메일 서비스를 이용해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으로 숨긴 지령과 대북 보고문을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에는 주로 디지털 파일에 적용되지만 스테가노그래피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고전적인 암호화 방식이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에게 인질로 잡힌 그리스 왕 히스티아에우스는 양아들에게 밀서를 보내기 위해 스테가노그래피를 활용했다. 노예의 머리를 깎은 뒤 두피에 메시지를 새긴 다음 머리카락이 자라 메시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노예를 아들에게로 보냈다. 오줌이나 우유로 종이에 글을 쓴 뒤 종이에 불을 쪼이면 글씨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스테가노그래피에 해당한다. 테러조직도 지령을 몰래 전달하기 위해 스테가노그래피를 이용한다. 5월 초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사살된 오사마 빈라덴의 은신처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된 다수의 포르노 비디오가 발견됐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이 포르노 비디오는 ‘왕재산’ 총책 김 씨가 갖고 있던 신문 기사처럼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으로 위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재산’과 북한 공작조직 간에 사용된 음어(陰語)도 있었다. “베이징대리점에 회사경영전망자료를 보냅니다.” 회사에서 업무 차 주고받은 대화처럼 보이지만 뜻을 풀면 “베이징지사에 정세분석 자료를 보낸다”는 말이 된다. ‘구매업자’는 본부, ‘예약자’는 조직연락원, ‘상품안내소’는 조선노동당을 각각 의미한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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