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연평도 포격 도발]연평도 한때 대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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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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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또 쏘나” 치떨고… “어떻게 살라고” 탄식

자동급탄차 실전 배치 28일 오후 연평도 해병대 부대에서 K-9 자주포에 포탄을 자동 장전할 수 있는 장갑차 K-10 자동급탄차가 실전 배치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평도=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자동급탄차 실전 배치 28일 오후 연평도 해병대 부대에서 K-9 자주포에 포탄을 자동 장전할 수 있는 장갑차 K-10 자동급탄차가 실전 배치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평도=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대피해 대피! 무조건 빨리 나가!” 28일 오전 11시 20분. 조용하던 연평면사무소 1층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터졌다. 면사무소 2층 브리핑룸에서 기사를 작성하던 취재진의 바쁜 손길이 순간 멈췄다. 기자는 취재수첩과 볼펜을 들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지만, 1분도 안 된 그새 20명이 넘게 북적이던 면사무소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사람들이 인근 연평초등학교 대피소로 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급했던 한 직원은 화단에 설치된 펜스를 넘어 정신없이 달렸다. 이날 상황은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서해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된 이날 오전 북한의 해안포 발사 징후가 다시 한 번 포착되면서 연평도 전역에 40분간 주민 대피령이 떨어졌다. 23일 북측의 포격 도발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과 면사무소 직원은 물론 국내외 취재진, 자원봉사자, 군인들이 황급히 근처 방공호로 대피했다. 북한의 포격 훈련으로 밝혀져 대피령은 곧 해제됐지만 대피소에 피신한 주민들은 “진짜 또 포를 쏘는 것이냐”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무조건 대피해” 다급했던 상황

이날 대피령은 오전 11시 20분부터 11시 57분까지 약 37분 동안 계속됐다. 주민들과 자원봉사자, 취재진 등이 연평초교 내 방공호에 모일 때쯤 인천 소방안전본부는 마을 스피커로 “북한 해안포 기지에서 화력 도발 징후가 보이니 대피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섬 전체를 뒤덮는 굉음의 사이렌 소리도 23일 포격 이후 처음으로 울렸다. 연평초교 내 방공호에는 5분도 지나지 않아 70여 명이 모였다.

주민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상황을 묻자 면사무소 측은 “군에서 대피령을 내렸다”면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방공호에 모인 주민들은 북측의 포격이 재연될 가능성에 치를 떨었다. 꽃게잡이 어민 박진구 씨(51)는 “방송을 듣지 못했는데, 이웃 주민이 ‘피하라’는 전화를 해서 대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대피령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육지에서 보낸 물건을 찾으러 나루터로 가던 중에 내려졌다. 주민 박철훈 씨(56)는 “나루터에 아는 사람 마중을 나갔다가 방송 듣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며 “스피커 상태가 좋지 못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대피령일 것 같아 무조건 내달렸다”고 했다. 박 씨는 “오늘 고비를 넘기면 다음 주쯤 어선을 띄울 수 있지 않겠느냐”며 “끝까지 연평도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 긴장된 순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피령은 해제됐지만 연평도 전역에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해병대 연평부대는 비상령 해제 후인 낮 12시 3분경 “가급적 통행을 삼가 달라. 파편 및 포탄 잔해를 발견했을 때는 군 작전본부로 알려 달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해병대 연평부대는 23일 포격으로 무너진 군 통신선을 복구하고 K-9 자주포에 포탄을 공급하는 K-10 탄약보급 장갑차를 배치하는 등 하루 종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비했다.

○ 피란민 TV 보다 “또 포탄인가” 탄식

연평도에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 중구 신흥동의 연평도 피란민 임시 숙소인 ‘인스파월드’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북한의 추가 도발을 우려해 연평도를 떠난 피란민 900여 명은 이 건물 2층 휴게공간에 설치된 TV 앞에 모여 연평도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피란민 강유선 씨(67·여)는 “남편이 오늘 오전 여객선을 타고 연평도에 들어갔는데 북한이 또 도발하면 어떡하느냐”며 가슴을 졸였다. 피란민 박춘옥 씨(46·여)는 “연평도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남편이 걱정돼 가슴이 철렁했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피령이 해제되자 피란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한 주민은 “북한의 도발로 끔찍한 공포를 체험한 피란민 대부분이 삶의 터전이었던 연평도로 돌아가는 것을 체념할 정도로 지쳤다”며 “정부가 피란민 이주 문제를 포함한 근본적인 대책을 빨리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령도와 대청도 등 다른 서해 5도에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백령면과 대청면 사무소 등은 군부대와 협의해 대피소 70여 곳에 담요와 비상식량을 비치했으며, 백령병원과 각 섬의 보건소들도 전 의료진이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연평도=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 5대째 연평도 지킨 前주민자치위원장 최율씨의 하소연 ▼
“다시 고향 못돌아갈 것… 뭍에서 새 직업 알아보렵니다”


“뭍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고 있어요. 어민으로 연평도에서 30여 년 살아왔지만 악몽 같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다시 연평도에 들어가 살지 못할 것 같아요.”

28일 연평도 피란민 임시 거처인 인천 중구 인스파월드에서 만난 최율 전 연평도 주민자치위원장(53·사진)은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평도에서 5대째 살아온 그는 평생을 어민으로 생업을 꾸려온 연평도의 산증인.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의 연평해전을 겪으면서도 고향 연평도를 그토록 사랑했던 그가 고향을 떠날 생각까지 할 만큼 이번 북한의 포격 도발이 준 충격은 컸다.

“총알 100발이 터져도 꼼짝 못하는데 폭탄 100발이 터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북한군의 2차 포격 때 부두에서 차를 몰고 마을로 들어와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민들과 함께 대피소로 피신하고 있었죠. 그 뒤 불과 몇 초 뒤 30m 앞에서 ‘쉬익∼’ 소리와 함께 섬광이 비치면서 포탄이 터졌어요. 고막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죠.” 최 회장은 “인천으로 피신한 뒤 다시 짐을 챙기러 연평도에 들어갔을 때 본 내 고향은 처참한 전쟁터였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이곳 임시 피란처에 있는 주민 상당수는 정부에서 다시 집을 고쳐 준다고 해도 연평도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낼 것”이라며 “평생을 바다에서 생활해 담력과 배짱이 두둑하다고 자신했던 나도 바로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자 2시간 동안 아무 일도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이곳 피신처에 있는 주민 절반 정도가 연평도에 되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며 “3, 4년 후 꽃게잡이 배도 크게 줄고 여객선 운항 횟수도 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는 찜질방에 누워 있는 주민들을 가리키며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모두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북, 전군 비상경계령 2호 발령”
▲2010년 11월25일 동아뉴스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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