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 현대사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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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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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10주년’… 각계인사 10명이 말하는 그 의미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한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 민족의 통일과 화해·협력 원칙에 합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은 두 정치 지도자의 의지로 분단 후 55년, 6·25전쟁 후 50년 동안 굳어진 한반도의 냉전구조가 허물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는 냉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외견상 빠르게 가까워졌던 남북관계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2008년 7월)과 천안함 폭침사건(2010년 3월)으로 산산조각이 난 형국이다. 10년 전 6·15공동선언은 한반도 현대사에서 과연 무엇이었을까.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목소리를 내온 각계 인사 10명에게 의견을 물었다(가나다순)》

“돈을 주고 산 거짓평화”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장(전 통일원 차관)=6·15는 돈을 주고 산 거짓 평화였다. 우리는 6·15를 통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평화통일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사건에서 보듯이 그것은 거짓 평화였다. 남측의 지원은 북한 주민의 배고픔을 해소한 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생명만 연장시켰다. 선언 1항의 ‘우리민족끼리’는 한국 내 반미의식을 부추겨 이념갈등을 증폭시키고 한미동행을 위기로 몰고 갔다.

“한반도 탈냉전 전환점”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6·15선언은 한반도의 역사가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바뀌는 터닝포인트(전환점)였다. 한반도 평화 관리의 시작점이었다. 물론 포용정책은 지난 10년간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명암을 드러냈다. 현 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왔지만 강경책의 상호주의 역시 빛과 그늘이 존재한다. 포용정책은 그늘이 있었지만 우리의 삶에 안겨준 이익이 적지 않았다. 포용정책의 ‘뉴 버전’을 만들어야 한다.

“새 남북관계 연 합의문”


▽박명규 서울대 통일연구소장=6·15선언은 새로운 협력적 남북관계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남북 간 정치적 합의문서다. 선언은 남북 간에 필요한 모든 의제를 다룬 기본법이 아니며 구체적 제도화 부분은 이후의 상호 논의에 맡겨진 열린 합의다. 따라서 선언을 절대 강령처럼 높이는 것이나 반국가적 합의인 양 폄하하는 것은 모두 적절치 못하다.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 궁극적인 통일을 지향하려는 선언의 정신은 지금도 소중하다.

“실효성 담보 안된 허구”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6·15는 허구의 합의였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 통일 문제를 논의한 것은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후 남한의 유화적 대북정책만으론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에 놀아나기 쉽다는 게 확인됐다. 남한의 국가연합과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같다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크게 잘못됐고 합의해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김정일의 답방 등 합의 내용은 대부분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은 선언적 허구였다.

“방향 잘못된 물꼬 트기”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6·15는 방향이 잘못된 남북관계의 ‘물꼬 트기’였다. 6·15는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튼 것이다. 당시에는 상당한 낙관론이 있었다. 지금 보면 낙관론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하면서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아 남남갈등이 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지금 평가하면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북한에 접근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북화해협력 주춧돌”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6·15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남북화해협력의 기틀을 만든 주춧돌이었다. 비록 지금 일시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계속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백 편집인은 지난해 9월 화해상생마당이 연 심포지엄에서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으로 단순 회귀하는 것은 답이 되지 못하며 획기적으로 업데이트된 ‘포용정책 2.0버전’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가 아닌 선언일뿐”


▽복거일 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6·15는 선언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언은 근본적인 실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선언이 실제인 것처럼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에 동조한 사람이 의외로 많아 남북관계가 사상누각이 돼 버렸다. 공산주의와 함께하는 선언은 그 실질적 의미가 작고 이념적 차원에서 해독이 크다. 그 선언에 바탕을 두고 공산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선전선동을 했다.

“북 변화 잘못된 예측”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6·15는 잘못된 예측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도와주면 북한이 보답하지 않겠느냐는 선의에서 출발했다. 햇볕(대화와 대북지원)을 쬐면 북측이 코트를 벗고 나올 것(비핵화와 개혁과 개방 등 정책 변화)이라고 예상했다. 10년간 햇볕을 비췄지만 북한은 코트를 벗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정책도 햇볕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핵을 포기하고 개혁 개방을 해야 지원한다는 조건을 단 것이다.

“선평화 후통일 합의”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6·15공동선언은 ‘선(先)평화 후(後)통일’에 대한 남북의 합의였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정부가 추진한 ‘선평화 후통일’ 정책이 선언에 반영돼 합의됐다. 북한은 적화통일을 하지 않고 남한은 흡수통일을 하지 않으며 평화통일을 하겠다는 합의였다. 선언 이전까지 피스키핑(평화 지키기)을 위해 남북이 노력했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 피스메이킹(평화 만들기)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갈등-협력 양날의 불씨”


▽최대석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6·15는 불씨였다. 북한의 핵 개발과 두 차례의 핵 실험, 두 차례의 연평해전 등 남북 간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협력을 이어가는 불씨였다. 그 불씨는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협력사업으로 확산됐다. 반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 인정 등 향후 남북 통일방안에 관한 논쟁과 대북 퍼주기 논쟁을 유발해 극심한 남남갈등을 촉발하는 불씨이기도 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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