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냉각탑 폭파 쇼

  • 입력 2008년 6월 24일 03시 01분


남한과 국제사회가 북한의 선의(善意)를 믿었다가 낭패를 본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1997년 8월 19일 함경남도 금호지구에서 열린 경수로 착공식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이 북한의 핵 포기 약속에 따라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 위해 마련한 착공식이었다. 정부의 요란한 홍보에 영향 받아 언론도 흥분했다. 신문은 ‘남과 북의 대역사(大役事)’ ‘통일 새벽 여는 경수로 일터’ 등의 제목을 달아 크게 보도했다. 방송은 착공식 장면을 2시간 뒤 전국에 녹화중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북핵 세리머니가 또 벌어진다. 북한은 27일로 예정된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장면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다며 한국의 MBC와 미국의 CNN, 일본 중국 러시아의 통신사를 초청했다. 북한이 언론사에 참가비를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위야 어떻든 냉각탑 폭파를 취재하게 된 매체들이 얼마나 요란을 떨지는 쉽게 짐작이 된다. 문을 꼭꼭 닫고 지내는 북한이 경수로 착공식 때처럼 폭파 행사를 외부에 공개하는 게 예사롭지 않긴 하다.

▷경수로 사업은 착공 9년 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한국이 부담한 11억3700만 달러를 포함해 15억 달러가 넘는 돈이 사라졌다. 북한은 그 사이 은밀히 핵 개발을 계속해 재작년 핵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에 다시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냉각탑 폭파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냉각탑은 20여 m 높이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냉각 및 증발장치는 이미 제거돼 껍데기만 남아 있다. 북한이 미루고 있는 핵 불능화 조치인 폐연료봉 인출, 미사용 연료봉 처리, 원자로 제어봉 구동장치 제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쇼일 뿐이다.

▷북한도 동의한 ‘10·3 합의’는 냉각탑 폭파 같은 쇼가 아니라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가 핵심이다. 북한이 곧 신고서를 제출한다 해도 약속시한은 이미 반년이나 지났다. 검증을 통해 사실 여부를 가리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야말로 북핵 공포에서 확실하게 벗어나려면 본격적인 핵 폐기 단계에 돌입하기 전에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북한의 술수를 세계와 남한이 알 만할 때도 됐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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