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꿈’에서 ‘대한민국의 꿈’으로

  • 입력 2007년 12월 20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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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당선자가 걸어온 길

역경 딛고- 초등생때 생활전선… 대학선 6·3시위 구속

질풍처럼- 30대 사장 40대 회장 50대 의원 60대 시장

시련 넘어- 청계천으로 大權 초석… 네거티브 공세 돌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질풍노도의 바다를 헤쳐 온 의지로, 그 길을 열고 온몸을 던져 달려가겠습니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8월 20일 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그의 인생은 TV 드라마 주인공의 소재로 쓰일 만큼 ‘질풍노도’ 그 자체였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50대 국회의원, 60대 서울시장이라는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이뤘지만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생긴 10여 차례의 벌금형, 선거법 위반, 자녀 위장 전입 등의 흠집 때문에 선거 기간 내내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짧지만 강렬했던 학생운동, 27년 동안 종업원 90여 명이던 중소기업을 종업원 16만 명의 국내 최고 기업으로 우뚝 세운 기업인, 집념으로 서울시장을 성취한 정치인으로서 그의 인생역정은 그런 작은 흠을 메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관련 화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콤플렉스 가진 가난한 어린 시절=이 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목장 인부였던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 3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그의 어머니는 밝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의 이름을 ‘밝을 명(明), 넓을 박(博)’으로 지었다.

이 당선자가 어린 시절에 겪은 가난은 당시 ‘보릿고개’ 시절과 비교해서도 혹독했다. 그는 “아이들이 도시락을 풀고 점심을 먹는 동안 나는 운동장으로 나와 펌프 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하루 두 끼는 술찌끼로 때웠다”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고 어린 시절을 기억할 정도다.

그의 가족은 광복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도 거지들이 사는 쪽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풀빵, 엿, 밀가루떡, 뻥튀기 장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포항중,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가난’은 이명박 소년에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그는 고교 시절까지 늘 성적이 1등이었지만 한 번도 학급 반장 같은 감투를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남 앞에 나서길 꺼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차표 한 장’만 손에 들고 무작정 상경한 그는 무허가 판자촌에서 지냈다. 매일 아침 인력시장에서 구한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는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뒤 이태원 산동네에서 잠수교 공터까지 리어카로 쓰레기를 나르며 등록금을 벌었다.

이 당선자는 고려대 상대 회장에 당선된 뒤 대학 4학년 때 고려대 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6·3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4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샐러리맨의 신화’=대학시절 그의 꿈은 ‘샐러리맨’이었다. 그는 “대학을 준비할 때 인력시장을 매일 나갔지만 하루 공치면 일당이 없었다. 한 달 일하고 월급 받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복역 기간에 “문제를 제기할 권리는 학생에게 있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은 따로 있다. 학생운동을 직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출소 후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학생운동 전력 탓에 입사가 힘들어지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국가가 개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유명하다.

입사 1년차의 경리과 직원이던 그는 태국 공사 현장에서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인부들이 폭도로 변해 “금고 열쇠를 내놓아라”라며 단도를 던지고 발길질을 하는데도 꿋꿋하게 금고를 지켜 정주영 회장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골재 생산업체가 청와대의 지시를 먼저 이행해야 한다며 그와 약속한 시한을 지키지 않자 불도저로 업체의 업무를 막아 청와대의 양보를 받아 낸 것, 신군부가 중공업 중복 투자를 쇄신하겠다며 현대에 자동차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아 무산시킨 것 등은 최고경영자(CEO) 시절 유명한 이야기다.

▽‘비주류에서 주류로’=최근 캠프에 합류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명박 후보가 경제인 출신이라 정치를 모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기업인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당선자가 정치에 입문한 지도 벌써 15년째다. 그는 1992년 1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을 결심하고 합류를 제안했지만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는 정 회장과 맞서지 않기 위해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했다.

그는 1995년 지방선거 때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15대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선거비용 초과 지출 혐의로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고 의원직을 사퇴하는 큰 좌절을 맛봤다. 그는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회상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며 재기의 꿈을 키웠다. 2000년 귀국 이후 “최신 사이버 금융을 선보이겠다”며 BBK 대표이사였던 김경준 씨와 LKe뱅크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한 일은 김 씨의 BBK 주가조작 사건과 맞물려 대선 기간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02년 7월 민선 제3대 서울시장에 취임한 뒤 그는 굵직굵직한 성과를 내며 어느 샌가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18일 선거운동 마지막 일정으로 그가 들른 ‘청계천’은 그의 업적 중 트레이드마크로 남아 있다. 그는 상인전담팀을 만들어 반대하는 청계천 노점상들과 1년여 동안 4200번 넘게 만나 협조를 얻어냈고 2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당시 반대에 앞장섰던 정석연 청계천 상인연합회장은 이번 선거 기간 중 이 당선자의 지지연설을 하는 등 최대 후원자가 됐다.

지난해 서울시장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선거 국면에 뛰어든 그는 온갖 네거티브 음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부터 한 번도 지지율 1위를 놓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인생 신화’가 ‘대한민국의 신화’로 마무리될 수 있을지, 큰 짐을 지고 또 한 번의 출발점에 섰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성공스토리 (한나라당 제공)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다큐멘타리 (한나라당 제공)

▼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관련 화보 ▼

- 이명박 고향 “대통령 나왔다” 마을 잔치
- 귀화 외국인에서 ‘116세’ 할머니까지 ‘한표 행사’
- 출구조사 발표, 한나라 지지자 “이겼다. 만세!”환호


영상취재 : 신세기 기자
영상취재 : 박태근 기자


영상취재 : 신세기 기자
영상취재 : 박태근 기자


촬영 : 김재명 기자


촬영 : 전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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