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브로커]미국은 ‘애널리스트’… 한국은 ‘떴다방’

  • 입력 2007년 4월 2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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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대통령 보좌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당시 워싱턴에는 하나의 유머가 돌았다.

“만약 키신저가 죽으면?”

“닉슨이 진정한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거지.”

미국 대통령이 얼마나 핵심참모에 의해 좌지우지 되느냐를 보여 주는 일화지만 미국에서도 정치 컨설턴트는 선거 기간뿐만 아니라 당선 후에도 대통령의 참모 못지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대선을 승리로 이끈 정치 컨설턴트들은 ‘음지의 대통령’, ‘백악관의 마법사’로 불린다.》

일종의 ‘공신 예우’ 차원이라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정치 경제 국제 외교 안보 국방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논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하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평가다.

공약, 정책, 인사, 여론조사, 홍보 등 선거에 필요한 전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치 컨설턴트 밑에 포진돼 종합적인 선거 및 정치 전략을 내는 미국 정치 컨설턴트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치 컨설턴트=홍보, 선거 기획자 또는 선거꾼’으로 인식되고 있다.

○ 왜곡된 한국 정치 컨설턴트 문화

국내 정치 컨설팅 분야는 아직 미국과 비교해 세분화 및 전문화가 덜돼 있는 상태. 선거 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떴다방 식’ 선거 기획사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선거 기획, 홍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니 깊이보다는 ‘몇 명을 당선시켰다’, ‘누구 후보와 일했다’는 거품성 선전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

‘떴다방’ 식 정치 컨설턴트 회사는 주로 ‘○○○ 캠프 출신 특보가 차린 곳’이라는 점을 활용한다. 선거 캠프의 생리상 이름뿐인 많은 특보(특별보좌관)를 두는데 이 점을 이용하는 것.

일부 회사는 실제 전직 ‘특보’가 하기도 하지만 허위로 명함만 파서 영업을 하는 경우도 상당수. 기초단체장, 기초의원 등 작은 선거로 갈수록 후보들이 컨설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의외로 쉽게 계약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처음 출마하는 후보에게 주로 접근하고 △명함의 이력이 화려하며 △이런 방법이면 당선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이 확보했다는 유권자의 명단을 슬쩍 보여 주는 등의 행태를 보인다는 것.

정치 컨설턴트 회사인 민 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국내에는 여론조사를 하면서 정치 컨설팅도 해주는 이른바 폴스터(Pollster)가 있지만 이는 반드시 분리돼야 하는 분야”라며 “여론 조사자와 정치 컨설턴트의 관계는 애널리스트와 딜러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딜러는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토대로 투자를 하지만 분석만 가지고 할 수는 없다는 것. 정치컨설턴트도 선거 전략을 짜지만 여론조사만을 활용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선거가 항상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열악한 시장구조도 ‘날림’ 컨설턴트사를 양산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때문에 상당수 선거 기획사는 비수기에는 축제 홍보, 상업성 광고 기획 등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정치 컨설팅 회사인 e윈컴 김능구 대표이사는 “아주 부정적인 네거티브 운동이나 마타도어가 비책(秘策)이라도 되는 것처럼 접근하는 ‘협잡성’ 컨설턴트가 의외로 많다”며 “반대로 그런 걸 찾아다니고 가르쳐달라는 정치 신인들도 다수”라고 말했다.

○ 칼 로브의 파워

2000, 2004년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잇따라 승리하자 세간의 관심은 부시 대통령의 정치 컨설턴트인 칼 로브 씨에게 쏠렸다.

로브 씨는 리 에트워터(1988년 아버지 조지 부시 당선), 제임스 카빌(1992년 빌 클린턴 당선), 딕 모리스(클린턴 재선)를 잇는 대표적인 정치 컨설턴트다.

부시 대통령은 재선 직후 당선 연설에서 로브 씨를 가리켜 “우리 팀의 설계자”라고 불렀다.

로브 씨의 설계는 2000년 대선 기간뿐만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집권 1기 내내 이어졌고 이는 재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텍사스 주립대에서 대통령 정치론을 강의하던 브루스 뷰캐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백악관의 주인은 전통적으로 세 종류의 사람을 주변에 둔다. 첫째는 정치의 잣대로 정책 방향을 재단하는 정치 담당, 둘째는 공약 이행을 위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을 감독하는 정책 담당, 셋째는 언제 어느 때라도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로브 씨는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유례 없는 사람이다.”

박성민 대표는 “백악관 사무실로 로브 씨의 책을 옮기는데만 트럭 3대가 필요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라며 “산악인(대통령)보다 더 산을 잘 알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셰르파(정치 컨설턴트)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제 분야 의사결정의 경우 공화당 지지층, 보수계 싱크 탱크, 의회, 산업계, 미 연방준비위원회(FRB),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FC),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등에서 올라온 내용이 딕 체니 부통령과 로브 씨에게로 모아져 부시 대통령에게 기획·입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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