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총장시대…유엔은 한국인을 기다립니다

  • 입력 2006년 12월 16일 03시 01분


코멘트
《14일(현지 시간) 차기 유엔 사무총장 취임선서식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은 한 기자의 질문에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거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사람들이 전후 맥락을 따지지 않고 들었다면 아마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일본의 역사 왜곡 행태를 질타하는 말로 착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자의 질문은 “이란이 최근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 학살)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유엔이란 이런 곳이고, 유엔 사무총장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반 차기 총장의 취임선서와 함께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시대’가 열렸지만, 한국인에게 유엔은 아직도 멀고 낯선 곳이다. 다른 국제기구도 마찬가지다.》

○ 분담금 세계 11위… 국가별 쿼터 겨우 채워

한국의 유엔 분담금 비율은 올해 전체 유엔 정규예산의 1.8%에서 내년에는 2.2% 선으로 올라간다. 올해 분담금 3100만 달러는 세계 11위 수준.

그러나 현재는 유엔에 진출한 전문직급(Professional·이하 P직급) 이상 한국인이 32명. 분담금 비율 등을 감안해 결정되는 한국 쿼터(31∼40명)의 최저 인원을 간신히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식량계획(WFP)은 6명(쿼터 10명),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5명(쿼터 14∼19명), 세계보건기구(WHO)는 3명(쿼터 15∼21명). P직급 이상 쿼터가 정해진 16개 국제기구 중 13개가 쿼터 미달이다.

이유는 대부분 서류, 면접 그리고 필기시험 합격률이 낮기 때문이다.

평화유지군도 마찬가지. 올해 7200만 달러를 부담해 전체의 1.4%(12위)였던 한국의 유엔 평화유지군(PKF) 분담금 비율도 내년에는 1.7∼2.0% 수준으로 올라갈 전망이지만 현재 파견한 병력은 33명으로 79위다. 경제력 규모 순위에서는 매년 11∼13위권에 들고 있지만 ‘국제마인드 순위’에서는 아직 하위권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통계다.

고위급 진출 현황은 좀 더 심각하다. 유엔 사무총장 바로 다음 자리가 사무차장(USG·Under Secretary General)으로 60개 정도의 자리가 있고, 그 밑이 차장보(ASG·Assistant Secretary General)로 100명쯤 된다. 그러나 한국인 USG는 2000년에 임명된 김학수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 사무총장 한 사람뿐이고, ASG는 내년 1월 제네바로 부임하는 강경화 유엔고등인권판무관실 부판무관밖에 없다.

한국보다 분담금 비율이 훨씬 낮은데도 불구하고 유엔 사무국 고위직에 대거 포진해 있는 인도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강경화 부판무관은 “우리의 유엔 가입(1991년)이 한참 늦긴 했지만 고위직 진출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인 관심은 아직도 한반도에 머물러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유엔을 출입하는 이케다 신이치(池田伸壹) 기자는 “한국은 경제규모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작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저개발국가의 빈곤 퇴치나 경제개발지원 등에 있어 기여도가 적은 것이 사실”이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계기로 국제기구의 활동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의식도 문제다.

유엔본부 군축부에서 P직급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정담(45) 씨는 “유엔 근무를 희망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만나면 ‘유엔 근무를 통해 한국에 기여하고 싶어서…’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아직도 사고방식이 한국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유엔에서 오랫동안 이라크 전문가로 활동해 오고 있는 차기호(40) 씨는 “유엔에서 근무하면 한국보다는 오히려 다르푸르 문제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질 정도로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며 “근본적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으면 유엔 근무가 짜증이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엔은 192개나 되는 회원국 수만큼 일도, 문화도 다양한 곳이다.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파키스탄, 독일, 과테말라, 짐바브웨,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카메룬, 브라질….”

정담 씨에게 동료들의 출신 국가를 물어봤더니 그는 한참이나 손가락을 꼽았다. 군축부 P직급 30명의 출신 국가는 20개가 넘었다.

업무 성격도 다양하다. 정 씨가 속한 군축부처럼 군축회의 지원 업무를 맡는 곳도 있고, 지역전문가도 있다. 공보부에 있는 서석민(35) 씨는 아프리카에서 유엔의 빈곤퇴치 활동을 홍보한다. 평화유지군 엔지니어링 부서에서 일하는 노수미(34) 씨는 건축설계사. 평화유지군 지원업무를 맡고 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유엔본부 근무 한국인의 뉴욕생활…만족감 크지만 물가 너무 비싸요▼

아프리카 오지에서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 출신들이 모여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게 되는 유엔 생활은 어떨까.

유엔본부에 근무하는 한국인 4명은 인터뷰에서 의외로 “문화와 인종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가 대체로 일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일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유엔 직장’과 다른 직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같은 사무실에 수십 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는 점.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려면 나름의 적성이 필요하다.

정담 씨는 “평생 처음 들어본 나라 출신도 있다. 그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다른 문화,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국제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유엔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무실에 유엔문화(UN culture)라는 것이 형성된다. 서석민 씨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보수 수준에 대해 선진국 출신과 저개발국 출신 직원 간의 반응이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다. 선진국 출신 직원들은 “민간기업에 비해 적다”고 느끼는 반면 아프리카 출신 직원들은 유엔 보수 수준을 거의 천문학적으로 많게 느낀다는 것.

정 씨는 1에서 5까지 있는 P직급에서 두 번째로 높은 P4. 그의 연봉은 13만 달러(약 1억2350만 원)다. P2 직급인 서 씨의 연봉은 8만7000달러(약 8265만 원). 뉴욕 일대는 집값과 교통비가 미국에서 가장 비싼 지역이어서 이 정도 소득으로 풍족하게 살기는 어렵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정 씨는 “돈을 벌려면 유엔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혼으로 맨해튼에서 살고 있는 서 씨는 “임차료를 내고 기타 잡비를 쓰고 나면 저축하는 돈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년이 62세까지 보장되고 연금이 다른 직종에 비해 나은 것은 큰 매력이다. 휴가를 1년에 한 달 정도 쓸 수 있고 자녀교육비도 70%(최고 한도 2만 달러)를 지원해 주는 등 복지 혜택이 좋은 것이 장점이다.

업무가 공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민간기업에서는 잘 모르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회원국이 192개나 되는 공조직이어서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타성에 젖은 직원도 적지 않다.

정 씨는 “유엔 조직의 특성상 업무를 소홀히 하는 직원이 있어도 제대로 제재를 가하기가 쉽지 않다”며 “사무국 개혁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