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상근]죽은 자와 산 자의 재회

  • 입력 2006년 1월 24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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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군 부대원들은 임진강을 건너고 북한산을 거쳐 서울 종로구 세검정 길에 도착했다. 1968년,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1월 21일 밤 10시경이었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자 자동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31명의 부대원은 김신조 씨를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거나 자폭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이었던 이들은 ‘북한군 중국군 묘지’에 누워 있다. 경기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야산, 군 관계자들은 ‘적군묘지’라고 부른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한 북한군 25명과 중국군 1명 등 모두 183명이 안장돼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과 중국군 시체는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미국과 북한이 유해 송환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군 당국은 1996년 5월 적성면에 적군의 시체를 모았다. 1987년 김현희와 함께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뒤 자살한 김승일이 여기로 옮겨졌다. 1998년 반잠수정을 타고 남해안으로 침투하던 공작원 6명도 묻혔다. 육군 유해발굴단은 전쟁 때 숨진 적군 시체를 수습하면 이곳으로 보낸다.

묘지가 차자 2000년에 제2묘역을 만들었다. 육군 비룡부대는 적군묘지 내 봉분에 떼를 입히고 진입로를 정비한다. 3개월에 한 번씩 벌초한다. 명절 때는 제사를, 주검이 새로 들어오면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제네바 협정은 ‘교전 중 사망한 적군 유해를 존중하고 묘지를 관리해야 한다’(추가의정서 34조)고 명시하고 있다. 비룡부대 김정태 중사는 “한민족이고 한핏줄이니 인도적 차원에서 당연히 관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전사’의 시체를 인수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측에 요구한 적도 없다. 간첩과 공작원과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다.

적군묘지가 있는 적성면에서 자동차로 40분 걸리는 광탄면 보광사에는 ‘불굴의 통일애국열사 묘역’이 있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주도해 지난해 5월 만들었다. 이 사실이 지난해 12월 알려지자 북파공작특수임무동지회와 대한민국애국청년동지회 회원들이 묘비를 부숴 버렸다.

이들은 “비전향 장기수가 북한의 소모품으로 분단 조국의 희생자였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이 나라를 파괴한 사람인데 통일열사나 의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애국’이니 ‘열사’니 하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적법 절차를 거쳐 묘역을 만들었더라면,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 묘역’이라 불렀다면 장기수와 빨치산 6명은 적군묘지에서처럼 조용히 영면할 수 있었다.

김신조 씨는 32년 뒤 동료들을 만났다. 적군묘지에 124군 부대원이 묻혔다는 동아일보 기사(2000년 2월 14일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는 당시 미군이 발간하는 ‘성조지’ 취재진에 “우리가 통일되고 좋은 관계를 가진다면 누군가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적군묘지는 북쪽을 향해 만들었다. 부모 형제가 사는 북한을 보라는 배려에서다. 그들의 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북한 측이 유해를 받아들이면 어떨까. 북녘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재회한 뒤 살아 있는 납북자, 국군 포로를 남녘의 부모 형제 품으로 보낼 수는 없을까.

송상근 사회부 차장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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