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피해자 등치는 사기 기승… 1억5000만원 가로챈 70대 영장

  • 입력 2005년 3월 8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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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고생했던 김모(87·전남 화순군) 씨는 최근 ‘일제 강점기 한국인피해연구소’ 사무국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은 “여기는 정부 보조로 설립된 연구소인데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일제피해 진상규명위)에 제출할 서류 작성 수수료로 15만 원만 내면 보상을 받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올 2월부터 일제피해 진상규명위가 피해 사실을 접수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인 절차를 모르던 김 씨는 인적사항과 돈을 보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 사무실로 전화를 하려 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지 오래였다.

정부가 일제피해 진상규명위를 통해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신고를 접수한 이후 이런 종류의 사기사건이 벌어지면서 피해자들이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같은 수법으로 687명에게서 수수료 명목으로 1억5000여만 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사기)로 8일 고모(79)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고 씨는 지난해 10월 부산 중구에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인희생자 권익문제연구소’라는 사설단체 사무실을 연 뒤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보상금 청구소송을 일본 법원에 제기해 승소했으며, 일본 정부가 한국인 피해자 72만 명 몫의 임금 8조7000억 원을 법원에 공탁해 놓았다”며 피해자 모집에 나섰다.

고 씨는 “일본 정부가 관련서류를 갖고 있지 않아 78세 이상만 되면 징용 여부와 관계없이 보상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말에 속은 양모(54·여) 씨는 친인척 중 강제징용 피해자가 없는데도 시아버지 등 6명 몫의 서류를 제출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 보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20개 안팎의 단체가 있지만 수수료 명목의 돈을 챙기는 곳은 사기단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기단체 접촉해보니…▼

“15만 원만 내면 최대 2억 원까지 보상받을 수 있어요.”

7일 오후 본보 취재팀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사기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고모(79) 씨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유령단체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인희생자 권익문제연구소’에 전화를 걸자 이같이 유혹했다.

연구소 상담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모(51·여) 씨는 “우리는 전국에 수십 개의 지부를 가진 대형 단체”라며 “보상금은 이미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정부가 발표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이라며 말을 꺼냈다.

이 씨는 권익문제연구소가 지난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단독으로 피해보상소송을 벌여 합의를 이끌어냈던 단체라고 주장했다.

또 “일본에서 145명의 변호인단과 함께 14년 동안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 엄청난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는 이어 “현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피해신고를 받고 있지만 그 쪽은 진상규명만 담당할 뿐 피해보상은 우리가 맡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이 돈 얘기. 이 씨는 “징용을 다녀온 것이 확인되면 최대 2억 원을 지급받는다”면서 “징용 사실 확인이 안 되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은 정황만 확인되면 3000만∼6000만 원은 너끈히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8일 오전 취재팀이 이 씨가 얘기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연구소 주소지로 찾아가 보니 그곳에는 전혀 상관없는 S사 사무실만 있었다. 유령단체임이 확인된 셈.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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