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실용주의에 實이 빠졌다

  • 입력 2004년 6월 1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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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20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더욱 가물가물한 것은 그 무렵의 청와대 분위기다. 그때 청와대 사람들은 대통령이 조용히 돌아오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뒷문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대통령과 그들 모두 실용주의와 실사구시를 얘기했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어지럽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과 중앙위원들이 함께 어울려 울고 웃고 껴안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 청와대 잔치를 ‘조용한 복귀’라고 할 수 있을까. 공개강연에서 “별놈의 보수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고 몰아붙이는 것을 ‘뒷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면 이 같은 변신이 실용주의이고 실사구시일까.

▼독단과 편협은 反실용주의다▼

북적대는 청와대는 어느새 다시 현실정치의 전면에 서 있다. 대통령의 목소리도 직무정지 이전 못지않다. 지난주 청와대 만찬과 연세대 특강은 63일간의 강요된 칩거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와 함께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실사구시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흔들렸다.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미국의 실용주의나 공리공론을 배격하는 우리의 실학이나 철학적 바탕은 다르지 않다. 둘 다 독단과 편협을 거부한다. 19세기 말 미국의 실용주의를 꽃피게 한 윌리엄 제임스는 실용주의란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조화시키는 행복한 조화자(happy harmonizer)’라고 했다.

당쟁에 대한 염증에서 출발한 우리의 실학엔 한결 절실한 상생의 염원이 실려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아옹다옹 싸움질 제각기 자기 외고집/객지에서 생각하니 눈물 울컥 솟는구나/산하는 옹색하게 3000리뿐인데/비바람 섞어 치듯 다툰 지 200년.’(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이제 분명해진다. ‘보수는 힘센 사람이 좀 맘대로 하자는 것이다’는 식의 논법은 실용주의나 실사구시와 거리가 멀다. 보수와 진보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조화와 상생의 자세가 아니다. 더욱이 한쪽을 청산돼야 할 ‘조폭’으로 모는 것은 불화와 상쟁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진보세력 내에서 대통령이 과연 진보주의자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더 의아하다.

대통령이 갑자기 묵은 서랍에서 꺼내 든 민주대연합론이라는 것도 혼란스럽다. 누구와 연합한다는 말엔 다른 누구에 대항하거나 다른 누구를 배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내 다수파의 연합론은 도덕성과 정당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위험하기도 하다.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부도덕성과 부당성을 역설해 온 1990년의 3당합당과 현시점의 민주대연합론이 뭐가 다른지도 의문이다. 강한 쪽이 더 강해지려고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감춰진 지역주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점도 마찬가지다. 앞에선 국민통합을 강조하면서 뒤로 분열의 불씨를 키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실용주의가 아니라면 뭘까?▼

아마 감격적으로 국정에 복귀한 대통령의 의욕과잉이 잠시 이처럼 발길을 엇갈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실용주의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 발걸음이 엉켰을 수도 있다. 즉, 실용주의를 진실이나 실질의 실(實)이 아니라 이용이나 활용의 용(用)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혐오하는 기회주의에 가깝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키아벨리즘이 연상된다.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드골은 정적들로부터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저서에 “주동적 인간에게는 이기주의와 교활성이 있으나 원대한 목표를 위해 쓴다면 그게 허용될 뿐만 아니라 높은 자질로 간주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드골시대와 지금은 다르고, 프랑스와 한국도 다르다. 대통령 역시 이를 잘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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