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얼짱 정치, 말짱 정치

  • 입력 2004년 2월 4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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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한 원로는 최근 총선 출마 문제를 상의하러 찾아오는 정치 지망생들에게 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정치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는가?”

이 원로의 질문은 ‘권력에의 의지’에 매몰되거나 ‘대통령병(病) 환자’가 되라는 주문이 아니다. 국회의원직을 신분 상승을 위한 좋은 직업으로 생각하기에 앞서 ‘정치(正治)에 대한 지향’과 ‘자기 함양의 노력’을 통해 자신을 다지고 채워 가겠다는 초심(初心)을 잃지 말라는 우회적 일깨움일 뿐이다. 또 국회의원직의 ‘무거움’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17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 공천’이란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는 각 당의 ‘이벤트성’ 영입 공천 경쟁은 총선을 ‘가벼움’의 경쟁으로 몰아넣는 듯한 느낌이다.

정치의 이벤트화는 물론 세계적인 추세다. 하지만 콘텐츠는 제쳐 놓은 채 용모 좋은 ‘얼짱’이나 말 잘하는 ‘말짱’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는 듯한 각 당의 태도는 “혹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구축하는 결과만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들게 한다. 특히 한나라당이 최근 20여분간의 면접심사토론으로 일부 지역구의 후보를 단수로 결정하고 있는 ‘정치 실험’을 진행하는 데 대해서는 당 내에서조차 “개그 콘테스트를 하자는 얘기냐”는 비아냥거림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 의아한 대목은 정동영(鄭東泳) 의장 체제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의 이벤트 정치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경우도 별달리 공천을 관통하는 전략이나 테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당의 영입 전략이 전혀 없다. 영입 대상자 명단을 보면 마치 인기인 목록을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콘텐츠와 정체성 부재의 공천이 빚어낼 가장 큰 후유증은 아마도 ‘준비 안 된 아마추어 정치 신인’의 양산일 것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바꿔 열풍’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한 386세대 초선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스정치에 쉽게 순응하며 기성 정치인 뺨치는 변신의 행보를 보인 것은 그 단적인 예다.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오세훈(吳世勳) 의원이 ‘부속품으로서의 무력감’을 토로한 이면에는 개혁의 대오(隊伍)마저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젊은 동료 의원들에 대한 실망감이 깔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마키아벨리는 “국민을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국민의 행복을 가장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옳은 것을 위해 행동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다”고 지적했다.

시대의 화두(話頭)를 잡으려 하기보다는 화면(畵面)잡기 경쟁에 치중하는 ‘얼짱’ ‘말짱’ 정치의 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포퓰리즘이다.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문제 해결 능력, 용기, 비전에 대한 철저한 검증 없이 이벤트 정치로 달리고 달리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다가 멀지 않은 나라의 ‘불행한 과거’가 떠올랐다.

영화배우로서의 인기에 힘입어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됐다가 3년 만에 부패와 경제 파탄으로 도중하차한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 같은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란 걱정이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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