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有事법제 참의원 통과]"盧 訪日후 처리" 한국 요청 무시

  • 입력 2003년 6월 6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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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일본 참의원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 확정된 유사법제 3개법안은 결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방일 첫날을 가려버렸다. 노 대통령의 일본 도착 1시간여 전에 통과된 유사법제 확정 소식은 이날 일본의 주요 석간신문 1면 머리를 모두 장식했고, 노 대통령 방일 기사는 불과 2, 3단 정도로 줄어들었다.

노 대통령의 방일 첫날에 논란 많은 유사법제를 처리하는 데 대한 외교적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963년 방위청 내 일부 간부들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을 가상해 자위대 대응책을 비밀리에 검토한 이후 40년 만에 이 법안을 성사시킨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노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국 정부 당국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안의 확정시기를 가급적 방일 이후로 늦춰주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일본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노 대통령의 방일 직전, 정확히 일본 도착 1시간 전에 법안을 확정함으로써 한국측은 ‘기습’을 당한 셈이 됐다.

일본의 한 정계 관측통은 “국회 일정을 감안해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위한 법 제정을 가급적 빨리 마치자는 일본 정부의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법안 확정 직후 담화를 통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밝힌 대로 일본 정부는 테러 근절을 위한 미군의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법 제정을 서두를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국회 회기가 18일까지로 촉박해 앞으로의 일정을 고려해볼 때 한국측 요청대로 방일 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북한 핵 개발 위기, 이라크전쟁 등을 계기로 형성된 일본 내 보수강경 분위기라는 호조건을 살려 속전속결로 논란에 종지부를 찍자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외교적 결례 부분은 우선 고려대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회 의사일정 등을 감안해 볼 때 ‘외교적 고려’를 완전히 배제한 채 이날을 택해 법안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기국회 일정으로 보아 노 대통령이 방일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 처리해도 시간상 문제는 없다. 참의원 본회의도 월, 수, 금요일 열리기 때문에 의사일정의 조정과 같은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국빈 방문 첫날, 그것도 현충일에 외교적 결례를 당한 데 대한 한국민의 앙금은 깊을 수밖에 없다.

방일 일정 중 9일 오전에 갖기로 예정되어 있는 국회연설 등을 변경하는 등 상당한 강도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노 대통령은 방미 때에 이어 다시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방일기간 중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이 같은 가능성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번 정상회담 일정을 마련한 한국 정부의 미숙한 일처리도 당연히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유사법제 통과로 과거 침략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며 평화헌법을 지키려 노력해온 일본 국민과 주변국은 앞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유사법제 통과에 대해선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크다. 지식층과 전쟁체험 세대, 사민당 등 일부 야당의원은 ‘유사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 명확하지 않아 자의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민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했던 ‘전시동원령’과 흡사한 3개법안의 통과를 저지하려 했으나 무기력했으며 참의원 심의도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유사법제 주요내용▼

무력공격사태 대처법을 비롯한 유사법제 3개법안의 핵심은 유사시 총리와 중앙정부의 권한, 자위대 활동 범위가 대폭 확대된 것이다.

총리는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이 실제 발생한 경우뿐만 아니라, 공격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대응기본방침’을 결정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으며 기본방침에 따라 각종 비상조치를 행할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긴박한 사정상 사전에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국회가 ‘사태가 더 이상 긴박하지 않다’며 대응기본방침을 해제하라고 결의하면 정부는 이에 응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후 조치이며 판단 기준이 모호한 ‘유사시’ 개념을 정부가 악용할 경우 이를 견제하기가 쉽지 않다.

유사법제 제정으로 정부는 유사시 국가, 지방자치단체뿐만 아니라 지정 공공기관에 대한 광범위한 강제력을 갖게 됐다. 공영방송인 NHK TV를 비롯, 공민영 TV방송사를 유사시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기본적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이 많아 ‘전시동원령’의 재판이라는 비판도 있다.

자위대는 유사시 총리의 출동 명령 전이라도 적의 상륙에 맞서 해안 등지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작전을 위해 출동할 때에는 도로와 산림, 가옥 등 사유지도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만 있으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또 예를 들어 작전상 장애물로 여겨지는 가옥이 있다면 이를 파괴할 수도 있게 됐다. 유사시에는 의료법상 예외적인 사항으로 민간 의료진을 동원해 진료를 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전쟁 길 연 것" 中 강력 비난▼

중국 언론들은 6일 일본 참의원의 유사법제 관련 3개법안 통과에 대해 “전쟁으로 가기 위한 길을 연 것”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유사법제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일본은 이 법을 통해 유사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방송 등 언론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게 됐다”고 지적했다.

신화통신은 또 “일본의 많은 사회단체들이 이 법안의 통과에 대해 반대했다”고 밝히면서 “특히 일본 신문연합회는 5일 정부가 ‘유사(有事)’라는 명분 아래 정부에 대한 비판 보도와 국민의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해외 화교용 반관영 통신인 중국신문사는 “유사법제는 전수방위(專守防衛)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일본 평화헌법의 금기를 깨뜨린 전쟁 법률”이라면서 “전쟁으로 일본 국민을 위협하는 이 법안은 반드시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통신은 “유사법제 제정은 냉전종식 후 일본 안보전략 조정의 상징적 사건”이라면서 “이를 통해 일본 총리의 권한이 커졌으며 긴급사태시 내각의 결의를 통해 자위대에 직접 출동명령을 내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의 연합조보는 “일본 국회의 유사법제 통과는 미친 행동이며, 일본의 야합 정치의 산물”이라면서 맹비난했다.

이 신문은 특히 “일본 총리는 이 법안에 근거해 유사시 선제공격을 명령할 수도 있게 됐다”면서 “일본의 일부 신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핵무장론’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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