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송금 반드시 밝혀야 할 이유]정경유착 근절 않을땐 개혁 명분 잃어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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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한 외국기업을 상대로 ‘김대중 정권의 재벌개혁’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개선됐다’는 의견이 91%였다. 특히 주주권리 보호, 회계투명성, 경영진 책임에 대해서 70% 이상이 좋아졌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조사한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경제계의 지적이다. 대북 비밀송금 과정에서 주주권리가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회계의 불투명성,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총수의 전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철저히 파헤쳐 잘못된 정경유착 관행을 이 기회에 뿌리뽑아야 한다는 게 재계 및 금융계의 바람이다.

▽대북 비밀송금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산업은행이 경제논리에 따라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해줬다고 믿는 금융인은 없다.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작년 국정감사에서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이 이근영 당시 산은 총재에게 전화를 했다”고 증언, 정치권력에 의한 대출이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억원을 대출받은 현대상선은 이 가운데 2억달러를 북한에 보내면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현대상선 고위관계자는 “모든 일은 정몽헌 회장에 의해 이뤄졌는데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도 “건설업이나 해운업처럼 리베이트 주고받기가 관행으로 정착된 업종들이 현대그룹에 상대적으로 많은데다 회계처리나 자금운영의 투명성이 다른 기업들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어서 비밀송금의 파트너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철저히 무시된 주주들의 권익. 현대상선은 북한으로 보낸 2억달러에 대해 공시도 하지 않았고 재무제표에서도 통째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정작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공정거래위원회는 2000년 현대 등 4대 그룹에 대해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2002년 현대 등 6대 그룹에 대해 공시이행 점검실태 조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조사 결과다.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대북사업의 주체는 현대아산인데 현대상선이 경비를 부담했다”며 “이번 기회에 소액주주 등 피해 당사자들의 손실을 보전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밀송금 규명 없이는 개혁도 없다〓노무현 당선자의 공약집 9번 ‘재벌개혁 등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의 첫 번째 항목(9-1)은 ‘재벌의 정경유착 관행을 근절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수위 출범 이후 출자총액제한 강화,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 금융계열분리청구제 등에 대해서는 추진 의사를 밝히면서도 정경유착 근절에 관해서는 별 논의가 없다.

노 당선자는 최근 재계가 집단소송제를 반대하자 “집단소송제는 허위공시, 부실회계 문제, 주가조작 등 3개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도입한다”면서 “집단소송제를 반대하겠다는 것은 3대 부정행위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하지만 모 그룹 관계자는 “대북 비밀송금 사건은 허위공시와 부실회계로 주주에게 피해를 준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런 일을 덮어버리고 재계를 무슨 논리로 설득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례인 이번 사건을 노 당선자가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앞으로 재벌정책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 소장은 “‘통치행위’인지 ‘대북사업의 일환’인지 진실을 밝히고 책임 추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민족적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불투명한 대북사업이 용인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금감위 관계자는 “유독 현대만이 정경유착의 표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기업은 늘 수익을 찾아 새로운 사업을 추구하고, 신규 진입에는 대부분 이권에 따라붙기 때문에 정경유착의 가능성은 항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가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적당히 덮는다면 정경유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인 셈이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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