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에 선 한미관계 上]韓-美 현주소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6시 46분


《올해는 1953년 7월 6!?25전쟁이 휴전협정을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미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지도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한미 동맹 50주년을 맞는 새해의 한미관계는 위기감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변함없이 굳건할 것이라 믿어왔던 동맹 체제가 지난해 6월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 이후 끊임없이 확산되는 반미(反美) 기류와 북한의 대미 핵대결 자세로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세 차례의 특별기획시리즈를 통해 한미동맹 50년, 휴전 50년을 되짚어보고 변화하는 한미관계의 미래를 가늠해 본다.》

한미관계는 양국이 동맹국으로 지내온 지난 50년 동안에도 여러 가지 부침(浮沈)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감이 고조된 때도 드물다.

미국은 6!?25전쟁에서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모두 13만7250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6!?25전쟁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됐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우리의 기억에서도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

특히 최근 불거진 반미(反美) 기류와 북한 핵 문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한미동맹 관계에도 예전에 보지 못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반미기류가 북한 핵 문제마저도 ‘우리 민족과 국제사회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 ‘한민족 대 미국의 대결’로 보게 만드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냉전 종식과 남북화해, 그리고 전후세대 386세대 신세대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세대 변화 흐름이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종전의 인식틀에 ‘수정’을 요구하는 내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냉전이 종식되고 제네바합의(94년10월)에 따라 북-미관계가 개선되면서 한미 관계는 군사동맹의 성격이 약화하고,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성격이 변했다. 그러나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수평과 균형’을 요구하는 우리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한미관계에 반영되지 못했다.뿐만 아니라 남북화해 시대를 상징하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인식되는 분위기마저 형성됐다.

여기에는 우리의 대북(對北) 인식 변화도 한몫 했다. 한미 동맹관계는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현실적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막연하고 감정적인 분위기까지 일고 있지만 이 모든 변화를 담아낼 미래지향적인 한미관계 개선의 토대는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

외교안보연구원 김성한(金聖翰) 교수는 “북한이 한미관계의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면서 북한을 냉전시기의 적대국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포용대상으로 볼지에 대한 인식의 혼란이 생겼다”며 “그런 가운데 한미관계의 불평등 불균형 문제가 부각되면서 강력한 변화의 요구를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권의 정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감수했다고는 하지만, 1993년 김영삼(金泳三) 정부를 시작으로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더 이상 한미동맹관계를 정권유지의 기반’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고, 오히려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환경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같은 위기와 혼란은 한미관계의 진정한 개선, 특히 언젠가는 다가올 통일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산고(産苦)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통일연구원 박영규(朴英圭) 선임 연구위원은 “한미동맹은 상황변화에 맞춰 양국의 입장을 조정하는 채널이 열려 있기 때문에 무조건 감정적으로 반미를 외치기 보다는 사려깊고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안정에 필요한 한미동맹 관계의 변화요인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반성을 통해 양국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SOFA 변천사▼

1966년 7월 한미양국이 체결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은 이듬해인 1967년부터 발효됐다.

초기 SOFA는 ‘형사재판권 자동 포기조항’ 등 불평등 내용이 많았지만 냉전기와 남북대결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개정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1차 개정 협의가 시작된 것은 1988년 12월. 6·29 선언 이후 거세진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큰 몫을 했다.

3년뒤인 91년 1월 한미 양국은 재판권 자동 포기조항 삭제를 골자로 한 1차 개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의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규정이 여러 곳에 들어있어 ‘불평등 협정’이라는 비판은 여전했다.

92년 10월 케네스 마이클 이병의 윤금이씨 살해사건과 95년 5월 주한미군의 지하철 한국 여성 성희롱 사건이 터지면서 재개정 여론이 높아졌다.

한국 정부는 95년 7월부터 미측과 협상에 들어갔지만 미측은 96년 11월 7차 협상을 끝으로 일방적으로 협상을 중단했다.

이후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99년 4월 당시 홍순영(洪淳瑛) 외교통상부 장관이 미측에 조속한 개정을 촉구했고 그해 10월 한국정부는 미측에 SOFA 개정을 정식요구했다.

2000년 2월 크리스토퍼 매카시 상병의 한국인 여종업원 살인 사건은 SOFA 재개정에 대한 여론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해 7월에는 주한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 사태까지 드러나자 협상은 다시 재개됐고 결국 1차 개정 9년만인 2000년 12월 양국은 2차 개정에 합의했다. 2차 개정에선 살인과 강간 등 12개 중대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의 신병을 한국측이 확보할 수 있게 됐고 환경조항이 신설되는 등 상당히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의 책임자인 주한미군 병사 2명의 무죄평결은 국민들의 비난을 샀고, 대선과 겹치면서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12월 24일 한국측의 수사권 강화를 골자로 한 SOFA 개선안에 최종 합의했지만, 말 그대로 ‘개선’에 그쳐 논란의 여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변천 일지
시기내 용
1966년 7월SOFA 체결
1991년 1월한미 당국 1차 개정 합의. 형사재판권 자동 포기조항 삭제, ‘방위비 분담금 특별 조치협정’ 체결에 따라 한국이 매년 방위분담금 제공 결정.
1992년 10월미군 케네스 마이클 이병 윤금이씨 살해사건 발생
1995년 7월∼1996년 11월한미 양국 2차 개정 협상 시작, 미측의 일방적 중단 요구로 7차회의를 끝으로 중단
1999년 4월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 미측에 SOFA 조속한 개정 촉구
1999년 10월한국정부 미측에 SOFA 개정 협상 공식 요구
2000년 2월미군 매카시 상병 이태원 여종업원 살해 사건 발생
2000년 12월2차 개정 타결. 12개 주요 범죄에 대한 미군 피의자 신병인도 시기를 ‘재판종결후’에서 ‘기소시점’으로 앞당김. 환경조항 신설
2002년 6월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 발생
2002년 12월한미 양국 SOFA 개선안 최종 합의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미국대사-한국대사의 카운터파트는?▼

토머스 허버드 주한미국 대사는 지난달 13일 외교통상부를 방문해 약 20여분간 최성홍(崔成泓)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났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이날 저녁 전화를 걸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의 뜻을 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난 한해동안 약 10여차례에 걸쳐 최 장관을 만났고, 방한한 미국 고위인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김 대통령도 서너차례 만났다. 또 현 정권 외교안보정책의 사령탑으로 불리는 임동원(林東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가 지난 4월 방북할 때에도 별도로 접촉했고, 미 특사단이 10월초 방북할 때도 임 특보를 만났다. 주한 미국대사가 원할 경우 우리 정부의 고위인사와 수시로 접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의 카운터 파트에 해당하는 주미 한국대사는 어떨까.

북한 핵문제처럼 급박한 문제가 발생한 현상황에서 양성철(梁性喆) 주미 한국대사가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나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불시에 찾아가 만날 수 있을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고작 1년에 한번 만나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다. 사실상 우리 주미대사의 카운터 파트는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87년 11월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직후 미 국무부를 방문했던 김경원(金瓊元) 당시 대사는 미 국무부 차관보와 10분 이상 만나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미국이 한국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의 대외정책 중요도에 따라 빚어진 현상이라고 이해해야 될 것 같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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