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피터 벡/편지-사진 교환만이라도…

  • 입력 2002년 4월 24일 18시 42분


며칠 뒤면 제4차 이산가족 상봉단에 포함된 운 좋은 100명의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북녘의 일가친척들을 만나러 금강산으로 떠난다. 이산가족 상봉은 햇볕정책의 가장 빛나는 성과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어둠 속에 남아있다.

나의 장인은 황해도 실향민이다. 장인은 지금 서울의 한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고향을 찾고 친지들을 만나려는 그의 꿈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장인처럼 이산가족 상봉단에 끼지 못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헛되게 기다리고만 있다.

▼이산상봉 기다리다 숨져▼

장인 장모를 통해 나는 한반도 분단의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측면을 들여다본다. 장모는 아직도 당신이 자랐던 황해도의 과수원에 대해 아련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한다. 한국에서 맛있는 사과를 비롯한 싱싱한 과수들로 가득 차 있던 과수원에 대해 말이다.

장인 장모는 황해도 황주의 한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나 두 분이 혼인하기 전에 6·25가 터졌다. 장인은 통일이 되면 부모와 두 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홀로 월남했다. 장모는 부유한 지주였던 당신의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돌아가신 뒤 당신의 어머니 등과 함께 월남했다. 처삼촌은 북한군에 징집됐다.

장인 장모는 기적적으로 대구의 한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두 분은 그 뒤 50년 넘게 나머지 가족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남쪽의 수많은 실향민처럼 장인 또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했다. 장인은 다시 전쟁이 터질 것에 대비해 딸 여섯과 아들에게 당신 고향의 주소를 외우게 했다.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소매리다. 장인은 고향을 사랑하는 그만큼 북한 정권을 증오한다.

나는 장인이 김일성과 ‘빨갱이’들을 말할 때마다 내뱉는 여러 가지 한국의 욕들을 배웠다.

내 처가 한국인이라고 밝힐 때마다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처의 부모들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장인은 자신이 줄곧 이방인이라는 느낌으로 남한에서 산 탓인지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백서방’ ‘셋째 사위’ ‘형부’ 또는 ‘이모부’다. 장인으로부터 나는 “사위는 100년 손님”이라는 표현도 배웠다.

나는 처음에 장인이 금강산 관광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데 대해 놀랐다. 그러나 그 이유를 곧 알게 됐다. 장인은 금강산 관광이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인 장모가 지난해 버지니아에서 우리와 함께 지낼 때 황해도 출신들이 한국 식당에서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고향으로부터 1만4000㎞나 떨어진 곳에서도 장인 장모는 고향 사람들을 만나 위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다. 그러나 이산가족들의 비극을 제대로 다루려면 훨씬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한다.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통계 중 하나는 앞서 세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에서 매번 명단에 올랐던 사람 중 40여명이 상봉을 기다리다 숨졌다는 사실이다.

또 지난번 이산가족 상봉 뒤 14개월 동안 수천여명이 가족 상봉을 기다리다 숨졌다. 시간이 얼마 없다.

남북한은 간헐적인 이산가족 상봉 대신 너무 늦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북한이 빗장을 열고 모든 이산가족들이 만나게 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좀더 현실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영국 세필드대학의 제임스 폴리 교수는 올 가을에 출판될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저서에서 제도적 방안으로 서신이나 사진 교환을 제안했다. 이런 조치로는 북한은 주민들이 남한의 부유한 일가 친척들을 만나게 된다는 데 대해 위협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더 늦기전에 ´제도´마련을▼

이산 가족들은 또 서신이 북한 당국에 의해 검열되더라도 가족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할 수 있다. 서신교환을 통해 양측 관계가 가까워지고 이산가족들의 고통도 완화될 것이다.

장인의 꿈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우리 부부는 당신의 고향과 누이들과의 재상봉에 대한 소망을 내 딸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쯤 딸에게 “여기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았던 곳이다”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딸에게 황주 사과를 맛보여 줄 수 있을 때 딸은 선조들의 고향에 대해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터 벡 미국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연구실장beckdong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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