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이산상봉]'반세기 恨' 녹아내리다

  • 입력 2000년 11월 30일 18시 44분


▼北장남 만난 100세 유두희할머니▼

올해 100세로 남측 방문단 중 최고령자인 유두희할머니는 30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50년 만에 만난 큰아들 신동길씨(75)의 손을 부여잡고 한동안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유할머니는 몽매에도 그리던 아들이 말을 건넬 때마다 얼굴을 자신의 귓가로 끌어당겼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새 보청기를 했는데도 아들이 목청을 높여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

한참 아들 얘기만 듣던 유할머니의 입에서도 작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래 산 보람이 있어….” 모자는 이렇게 얼굴을 맞댄 채 반세기 동안 가슴에 쌓인 한(恨)들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유할머니에게 동길씨는 두번이나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래서 더욱 한으로 남은 아들이었다. 동길씨는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일제에 강제 징집돼 일본으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다했다.

해방이 되면서 강원 원주시 문막의 집으로 돌아온 뒤 1949년 결혼해 이제야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 6·25전쟁이 터졌다. 그 해 여름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던 동길씨는 이번에는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

유할머니에게 더욱 한이 된 것은 아들과 헤어질 때 집에 없었던 것. 이 때문에 아들과 작별인사 한마디하지 못했고 나중에 마을사람들로부터 아들의 소식을 전해들어야 했다. 며느리는 당시 친정으로 피란갔다가 재가를 했고 지금은 연락이 끊겨 버렸다.

유할머니는 50년 동안 동길씨의 결혼사진을 보며 모정을 달래 왔다. 유할머니는 둘째아들 종순씨(64) 내외가 1차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지켜본 후 “우리도 상봉신청을 합시다. 형님을 찾으려면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고 하자 “헤어진 지 50년이 다됐는데 설마…. 죽었겠지, 뭐”라며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달 10일 유할머니는 뜻밖에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아들이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됐고, 이후 아들을 만난다는 벅찬 기쁨에 주름진 손가락을 꼽고 또 꼽아왔다.

이런 어머니를 위해 둘째아들 종순씨는 “형님을 만나면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며 보청기를 장만해드렸다. 며느리 황한숙씨(60)는 방북 때까지 혹여 시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매일 곰국과 영양제로 건강을 챙겨드렸다.

<문철기자·평양〓공동취재단>full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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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아들 만난 한정서씨 "서울남은 아내도 왔더라면"▼

“애비 구실을 못해 미안하다. 니 에미도 같이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다섯살배기 재롱둥이 아들을 북에 홀로 두고 온 게 평생의 한이었던 한정서씨(80)는 30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55세의 장년이 된 큰아들 상순씨를 끌어안고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이번에 못 만나면 죽기 전에 큰애를 볼 수나 있을는지….”

같은 시간 한정서씨의 아내 정영실씨(79)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홀로 눈물만 쏟아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한 아들을 두고 평양과 서울에서 따로 한맺힌 가슴을 달래야 했다.

한정서씨는 아들과 며느리 송군실씨(53), 손자 성현씨(25), 손녀 명희씨(23)를 한꺼번에 만난 감격에 눈물지으면서도 한편으로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함께 평양에 오지 못한 아내 때문이었다.

서울의 정씨는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눈물이 하도 나와 오후엔 시장에 나가 배추 50포기를 사왔다.

김치라도 담그면 조금이나마 눈물이 그칠까 해서였다. 정씨는 기자가 찾아가자 “내 비디오를 찍어 남편을 통해 보냈는데 하도 울음이 나와 하고 싶은 말도 못했다”며 계속 울먹였다.

평남 강서군 출신인 이들 부부는 51년 1·4후퇴 때 세살배기였던 둘째 아들과 돌이 채 되지 않은 딸을 품에 안고 남으로 내려왔다.

한씨가 남녘 길에 함께 나섰던 누님에게 큰아들을 맡긴 것이 그만 천추의 한이 됐다. 이후 피란 인파 속에서 누님과 헤어졌고 이것이 큰아들과의 50년 생이별의 시작이 됐다.

이들 부부는 “어린애를 졸지에 고아로 만든 죄인인데…”라는 생각에 큰애가 계속 눈에 밟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부부가 함께 상순씨 상봉을 신청했고 다행히 한씨가 2차 방북단에 뽑혔다. 부부가 함께 갈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방문자는 한 명으로 제한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들은 또 한번 멍든 가슴을 달래야 했다.

한씨는 “엄마가 가는 게 아들한테 좋을 것 같다”며 아내에게 양보하려 했다. 그러나 방문자를 바꾸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아예 방북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는 얘기에 아내를 남겨두고 방북 길에 올라야 했다.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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