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위기인가]몇몇 실세가 나라를 주무른다

  • 입력 2000년 11월 29일 18시 51분


《경제를 비롯해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있다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지만 여권은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여권의 국정운영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여권의 의사결정과 인사, 그리고 정책 집행과 관리 감독능력의 문제점을 2회에 걸쳐 점검해본다.》

최근 민주당의 중간당직자로 임명된 A씨는 인선발표 이틀전 모 실세인사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자연 A씨는 이 실세인사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을 당직에 기용한 것으로 믿고 있다.

여권의 심각한 국정 난조와 그에 따른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기본적으로 여권 내 의사결정구조가 왜곡돼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무성하다. 즉 몇몇 실세들이 의사결정을 독점함으로써 주요 의사결정이 정부 여당의 공식라인보다는 각종 인연으로 얽힌 사적인 비공식라인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실세가 아닌 나머지 대다수 여권인사들이 방관자로 돌아서 개혁을 추진할 역량 결집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정책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그르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민주당에선 ‘실세인사’가 출근할 때는 구 당직자들이 줄줄이 쫓아다니며 자리를 부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또 당직 인사나 정치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정부 산하기관 임원 인사의 경우 실세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는 얘기가 여권에는 파다하다.

실세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불만도 고조되게 마련이다. 요즘은 민주당의 일부 최고위원들조차 공공연히 소외감을 토로할 정도. 박상천(朴相千)최고위원은 “최고위원들이 이렇게 구실을 못할 바에야 굳이 전당대회까지 열어 뽑을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실세들 간의 파워게임으로 의사결정이 지체되고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과정에서 실세가 아닌 여권인사들의 무력감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심지어 한나라당에서조차 “여권이 워낙 약체여서 난국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민주당이 검찰수뇌부 탄핵안 처리를 실력으로 봉쇄한 것은 표결에서 부결시킬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인데 여권이 그 정도로 취약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국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근본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대통령이 모든 것을 스스로 챙기면서도 주요 의사결정의 기초가 되는 정보를 제한적으로 몇몇 측근에 의존하고 있어 여권의 무기력과 난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스템 부재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도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대통령이 ‘보고된 정보의 포로’가 될 수도 있다”며 측근들에 의한 정보차단 가능성을 지적했다.

정권교체 후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는 ‘소수 여당’의 현주소가 이런 상황에서 당정쇄신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옷사건 때도 인사시기를 놓쳐 여권 전체가 엄청난 부담을 안았었다”며 “민주당 당직개편만 해도 9월에 처음 공론화됐을 때 단행했으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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