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종갓집 메주와 10년간 동침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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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표식품 된장공장장 이생재 이사

이생재 샘표식품 된장공장장이 2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샘표식품 본사에서 절구에 콩을 찧는 법을 설명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생재 샘표식품 된장공장장이 2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샘표식품 본사에서 절구에 콩을 찧는 법을 설명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종부(宗婦)는 완고했다. 남도(南道)에서 된장이 맛있기로 소문난 종가(宗家)의 며느리는 “메주만큼은 비밀이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된장 개발에 필요한 메주를 얻어오려던 사나이는 꾀를 냈다. 메주가 보관된 방의 창틀을 여행용 티슈로 쓱 닦은 후 그것을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메주를 발효시키는 종균은 된장의 맛과 향을 좌우한다. 사나이는 밀봉한 티슈를 들고 실험실로 직행해 곧장 분석에 들어갔다.

이것은 샘표식품 된장공장장인 이생재 이사(57)의 이야기다. 국내 정상급의 발효 전문가로 꼽히는 그는 샘표식품 임원 10여 명 중 유일한 고졸 출신이다. 그는 우리 전통 방식으로 익힌 된장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2006년부터 1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메주 100여 개를 구해 연구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10년 동안 갖다버린 콩만 200t 분량에 이른다.

이 이사는 원래 샘표식품 간장공장 직원이었다. 전북 익산공고 졸업 직후 미생물연구실로 배치된 그는 고졸 사원이 대졸 사원에게 승진에서 밀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학에 가려고 밤마다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만 몸에 무리가 와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생각이 바뀐 계기는 회사 상사의 호통이었다. 상사는 “연구실에서 충분히 실전형 공부를 할 수 있는데, 왜 공부를 따로 하느냐”고 했다. 이 이사는 “공부할 열정을 일에 쏟자”고 다짐했다. 이후 ‘발효강국’인 일본의 논문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가며 논문에 나온 미생물 배양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미생물과 가족이 됐죠. 종국(種麴·누룩의 씨)을 배양하려고 아예 회사에 침대를 갖다 놓고 밤을 새우며 동고동락했어요. 이젠 메주를 만지기만 해도 간밤을 잘 보냈는지 알 수 있죠. 잘 배양된 메주는 촉촉하면서도 뽀송뽀송해요. 그렇지 않은 메주는 거칠고 투정부리는 듯하죠.”

열정을 인정받은 그는 2002년 또래보다 빨리 부장으로 승진했다. 동시에 회사는 그에게 일본 도쿄농대 연수라는 선물을 줬다. 한국에 돌아온 이 이사는 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2006년 이사로 승진하면서 된장공장으로 간 그에게 전통식으로 발효한 된장을 개발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개발을 시작했지만 난관이 적지 않았다. 우선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메주에는 소금이 균일하게 스며들지 않아 한 달 이상 숙성은 무리였다. 다시 ‘메주와의 동침’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그는 우리 조상들이 가마솥에 쪄낸 콩을 절구로 찧었던 것을 떠올렸다. 기계로 누른 콩알에 미생물을 접종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소금물이 메주에 고루 스며들면서 장기 숙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올해 2월 ‘백일된장’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옛날 된장 중에는 해물 맛이 나는 것도 있었고, 산나물 맛이 나는 것도 있었어요. 아직도 전통 된장의 다양한 맛을 재현하기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제 꿈은 전통 된장을 대량 생산해 세계화시키는 거예요. 발효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일컬어지는데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반드시 해낼 겁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샘표식품#된장공장장#이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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