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 눈처럼 쌓인 ‘청춘의 사연’… 너무 많아 ‘1cm=몇장’으로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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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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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초 인기 프로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
김병우 前 PD, 40년만에 엽서 300여장 발견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40년 전 엽서들 사이에 선 김병우 전 동아방송 PD. 그는 “엽서를 찾았을 때 잃어버린 보물을 발견한 듯 말할 수 없는 감회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40년 전 엽서들 사이에 선 김병우 전 동아방송 PD. 그는 “엽서를 찾았을 때 잃어버린 보물을 발견한 듯 말할 수 없는 감회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밀려드는 엽서가 스키장에 쌓인 눈을 방불케 했죠.”(김병우 전 동아방송 PD)

1970년대 초반, 입시와 삶의 경쟁에 지치고 이성에 대한 그리움에 잠 못 이루던 젊은이들을 라디오 앞으로 끌어모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수 윤형주가 진행을 맡은 동아방송(DBS)의 ‘0시의 다이얼’이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김병우 전 PD(72)는 최근 ‘보물상자’를 발견했다. 애청자들이 보낸 엽서 300여 장이다. 1978년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몇 년 전 홀로 귀국한 그는 오래된 이민 보따리에서 40년 만에 소중한 추억들을 찾아냈다.

20일 그가 공개한 엽서들은 앞면에 또박또박 주소와 사연을 적고 뒷면에는 그림 등으로 장식한 것이 많았다. “이번에도 안 뽑아주면 방송을 안 듣겠다”는 ‘협박’도 적지 않았다. 한 청취자는 헤어진 연인의 생일에 ‘음악으로 대신 사과한다.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라며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를 신청했다. ‘노량진에서 성애’, ‘상도동 영숙’ 등 성(姓)을 뺀 발신자들의 엽서들이 동아방송에 밀려들었다. 넘치는 엽서 때문에 방송 사상 최초로 ‘엽서 전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낱장으로 세는 게 불가능해지면서 ‘두께 1cm면 몇 장’이라는 식으로 엽서 수를 추산하기도 했다.

김 전 PD는 “당시 희망곡으로 닐 세다카의 ‘유 민 에브리싱 투 미’, 조니 호턴의 ‘올 포 더 러브 오브 어 걸’ 등 애틋한 노래들이 주로 신청됐다”고 회상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의 마음은 룰루의 ‘투 서 위드 러브’에 주로 담겼다.

그는 “DJ 윤형주의 인기가 엄청났는데 전문 방송인이 아닌 가수가 DJ를 맡은 건 처음이었다”며 “기성세대의 훈계처럼 근엄한 방송인의 목소리 대신 청춘의 감성을 대변하듯, 여리고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가 청소년들에게 큰 공감을 샀다”고 말했다.

방송시간은 오후 11시 5분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당시 이 시간대 타 방송에는 거의 광고가 없었지만 ‘0시의 다이얼’에는 아모레, 쥬단학 같은 화장품, 반달표 스타킹, 대일·종로학원 등 예비 숙녀와 수험생들을 겨냥한 광고가 줄을 이었다.

오전 1시, 방송이 끝나면 기나긴 퇴근길이 시작됐다. 김 전 PD는 동아일보 차량으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집이 있던 윤형주와 초대 손님들을 모두 데려다준 뒤 오전 4시경에야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지난해 말 ‘통기타코리아닷컴’이란 인터넷 도메인을 샀다. 국내외에 다시 한 번 통기타 붐을 일으켜보겠다는 의욕에서다. 다시 찾은 ‘0시의 다이얼’ 엽서들도 이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동아방송의 DNA를 잇는 채널A가 재미있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제대로 가리는 공정한 방송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요즘의 큰 기쁨입니다.”(김 전 PD)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0시의 다이얼#김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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