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두번 이혼 세번의 결혼…김중만 “치열하게 찍어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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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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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에게서 추상을 깨닫다… 고시노 히로코에게서 긍정을 배웠다…사라 문에게서 치열함을 알았다…

김중만의 ‘황당하고 원대한 꿈’은 200년 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 요즘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굉장한 에너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작업실에서는 열대작물이 자라고 새가 난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김중만의 ‘황당하고 원대한 꿈’은 200년 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 요즘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굉장한 에너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작업실에서는 열대작물이 자라고 새가 난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아니, 여기에 뭐 찍을 게 있다고 서 계십니까?” 나올 때마다 듣는 소리다. 서울 성동구를 끼고 도는 중랑천 방죽 길. 그곳에 죽 늘어선 나무들을 본다. 어느 것 하나 성한 놈이 없다. 비바람에, 지나는 자동차에, 줄기건 가지건 상처투성이다. 길을 따라 쳐놓은 철망 옆에서 힘겹게들 버티고 있다. 휑하기만 한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으려 4년째, 400번 넘게 이 길을 걷는다. ‘내가 너희를 찍을 수 있을까, 그런 자격이 있을까’ 되뇌며 사진 4만 장을 생산해냈다. 한 번 찍은 피사체를 다시 찍은 적이 거의 없던 김중만(57)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 보지 못한 것

2009년 초 김중만은 프랑스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1)와 아프리카에 있었다. 그 전해, 한국을 방문한 르 클레지오는 30년 넘은 인연의 김중만을 서울에서 만났다. 그의 청담동 스튜디오에 들러 작품을 본 르 클레지오는 말했다. “우리 둘이서 책을 같이 낼까? 난 글을 쓰고 넌 사진을 찍고.” 얼마 뒤 르 클레지오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둘은 아프리카로 향했다.

두 사람은 4주 동안 서아프리카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해안 지역을 여행했다. 이른바 노예해안이라 불리던 곳.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떠나는 노예선에 실릴 노예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성곽들이 있었다. 김중만은 성의 문이며, 벽, 사람들을 렌즈에 포착했다. 가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으면 르 클레지오는 사진을 보자고 했다. 그러곤 말했다. “추상적으로 찍어라.”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추상적이라고?’ 1973년 카메라를 손에 쥔 이래 그에게 사진은 사실이고 기록이었다. 그 안에 정직함이, 진실성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추상(抽象)이라는 개념은 그에게 없었다. ‘추상적으로 찍는다는 게 어떤 것일까.’ 고민이 시작됐다. “지금도 찾아가는 중이에요.”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후 달라졌다. 2007년 상업사진에서 손을 떼고 중랑천 방죽 길을 걸을 때는 어렴풋하던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무를 보는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전에 나무를 찍는다면 한 그루를 오래 관찰하고 적절한 빛과 전체적인 구성을 생각했죠. 사실적인 사진이었어요.” 그 기준으로 보면 이 길에서 찍을 나무는 많지 않다. 그런데 어느새 그는 나무의 부분들을 찍고 있었다. 생채기 난 옹이, 늘어진 가지에 달린 잎들…. 소외되고 외로워 힘들어하는 영혼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 찾지 못한 것

김중만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 수감(收監)과 추방, 자살 충동, 그리고 정신병원 수용까지.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의지 결심, 이런 건 없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패션, 가수, 영화 포스터를 찍어댔다. 예측 불허의 스케줄로 매일같이 일했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 무계획, 무목적의 삶이었다.

그는 세상이 어둠과 밝음으로 이뤄졌다면 자신에겐 어둠 쪽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너무 밝으면 가벼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좀 더 위안을 찾으려 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고 말해야겠죠. 내 경험 때문에 어쩌면 더….”

그러던 2년 전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 고시노 히로코(小篠弘子·73)가 서울을 찾았다. 같이 저녁을 하면서 고시노 여사는 시종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김중만이 물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60은 넘었다고 들었지만 그에게는 60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답이 돌아왔다. “70이에요.” 그 10여 년 차이의 해답은 여사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그가 청했다. “선생님의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이튿날 여사는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그분이라고 고민과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 웃음은 세상을 긍정한다는 뜻이었어요.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지혜라는 걸 배웠죠.” 어쩌면 자신도 세상을 긍정하는 웃음을 갖고 있었지만 꺼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무렵 방죽 길 나무사진들이 어떤 위안을, 진실함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전에는 찾지 못한 것이었다.

○ 스쳐 보낸 것

2009년 9월, 세계 최고의 여성 사진작가 사라 문(70·프랑스)이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사진에 의욕을 불태우던 1976년, 김중만은 자신의 작품들을 보이기 위해 사라 선생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김중만은 서울에서 사흘간 사라 선생의 운전사를 자처했다.

전시회 전날 사라 선생은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실을 찾았다. 벽에는 이미 전문 스태프가 배치한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그때, 선생이 가방에서 줄자를 꺼내더니 사진과 사진 사이의, 불과 몇 cm 안 되는 간격을 재기 시작했다. 원래 구상과 차이가 있다 한들 오차는 1cm에도 못 미쳤을 터다. 그런데 사진의 대가(大家)는 손수 재점검을 하고 있었다.

망치로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저렇게 치열하구나. 자신의 메시지를 원하는 대로 올바르게 전하려면 단 1cm가 저토록 중요한 것이었구나.’

그도 치열함으로는 남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한 적이 있었다. 10여 년 전 사진을 찍다 죽어도 좋으니 (아프리카에) 가야겠다고 고집했다. 1년을 아프리카에서 지내다 돌아오기 전날 ‘이제 살아서 서울에 돌아가는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동물과 초목을 렌즈에 잡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건 이기적인 착각이었다. 오만이었다.

“사진을 나름대로 열심히 찍고는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던 거죠. 작품 하나를 보여주는 데에도 엄청난 치열함과 깊은 생각 없이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었던 거예요.”

방죽 길 나무를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줄, 그 자신도 몰랐다. ‘정말 내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나무, 너의 본모습은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셔터를 눌렀다. 이전까지는 무심코 스쳐 보낸 것들이었다. “해답은 없어요. 치열하게 찍어댈 뿐이죠.”

○ 돌아온다는 것


흑백 풍경사진에 탁월한 마이클 케나라는 유명한 영국 사진작가가 있다. 올해 초 그는 케나가 찍은 한국의 풍경사진을 보고 조금 웃음이 나왔다. ‘아, 내가 숱하게 찍은 미국과 유럽의 풍경사진을 보고 그네들이 지금 나처럼 웃었겠구나.’ 케나가 미숙하게 찍었다는 게 아니라, 뭔가 ‘짝퉁’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케나라 하더라도 한국의 풍경을 한국인의 감성처럼 잡아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60을 눈앞에 두고서야 김중만은 한국에,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까지 그는 ‘너는 누구냐’는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무의식중에 철저하게 차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쉴 새 없이 세계 곳곳을 오가면서 그럴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70을 넘긴 ‘현자(賢者)’ 셋을 비슷한 시간에 만나고 방죽 길에서 나무와 오랫동안 대화하며 그는 자기 자신을, 이 땅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여기에서 출발했고, 여기로 돌아갈 것이며, 내가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곳도 바로 여기라는 걸 알게 됐어요.”

40년 전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고, 끝내 갔던 김중만은 이제 비로소 돌아오고 싶다. 돌아오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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