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쓰고 450일간 “찰칵”… 禁斷의 땅에 홀려 지뢰 밟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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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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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9km DMZ 속살 기록한 최병관 씨

눈덮인 철책선 찍기 위해
석 달간 같은 장소에 오자
軍, 월북의심 보고서 올려

사진작가 최병관 씨가 DMZ의 모습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이 장면을 찍으려고 같은 장소를 3개월 동안 오갔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사진작가 최병관 씨가 DMZ의 모습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이 장면을 찍으려고 같은 장소를 3개월 동안 오갔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이번 비무장지대(DMZ) 사진작업 중 사고가 발생해 죽거나 부상을 당해도 일절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적은 뒤 도장을 찍었다. 사진작가 최병관 씨(60)는 자필유서를 옆에 있던 김모 중령에게 건넸다. 1997년 11월 7일, 강원 양구군 백두회관에서였다.

최 씨는 DMZ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달라는 부탁을 육군본부로부터 한 해 전에 받았다. 당시 육군 인사참모부장이던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엄연한 역사인 휴전선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아이디어를 냈다.

촬영은 1997년 2월 시작했다. 곳곳에 지뢰가 깔려 있고 북한군이 눈앞에 보이는 지역. 작가는 조금이라도 더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 불상사가 생길까 우려해서 군 관계자들이 제동을 거는 일이 늘었다.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자 최 씨는 유서를 내밀었다. 군이 조금 더 협조적으로 나왔다.

눈 덮인 철책선의 장관  병사들에게 겨울은 눈과의 전쟁을 치르는 시기다. 철책을 감싼 눈꽃이 파란 밤하늘과 어울려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얼차려를 받던 신병의 눈에 제대로 들어올리는 없었겠지만….
눈 덮인 철책선의 장관 병사들에게 겨울은 눈과의 전쟁을 치르는 시기다. 철책을 감싼 눈꽃이 파란 밤하늘과 어울려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얼차려를 받던 신병의 눈에 제대로 들어올리는 없었겠지만….
최 씨는 이듬해 7월까지 장병들과 숙식을 함께하면서 DMZ의 속살을 관찰했다. 서해 말도에서 동해의 해금강, 그리고 다시 서해 말도로 249.4km를 걸어서 오갔다. 촬영분량은 10만여 장에 달했다.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야생화를 발견했을 때 최 씨가 홀린 듯 꽃밭으로 들어갔다. 미확인 지뢰밭임을 알리는 수신호를 보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자 장병이 제지했다. 한걸음만 더 내디뎠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DMZ에서 가장 높은 가칠봉에서 철책선 절벽을 타고 내려가다가 2m 높이의 눈 속에 빠져 질식할 뻔한 적도 있다.

여자친구 편지도 뜯지 못한 채  밤샘 경계근무를 선 뒤 내무반에 들어온 순간, 빨간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 몰래 읽어보리라. 설레는 마음도 지친 몸을 이기진 못했다.
여자친구 편지도 뜯지 못한 채 밤샘 경계근무를 선 뒤 내무반에 들어온 순간, 빨간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 몰래 읽어보리라. 설레는 마음도 지친 몸을 이기진 못했다.
“포탄 구멍이 숭숭 뚫린 녹슨 철모 사이로 꽃이 피어나는 걸 보면, 마치 철모 주인이 환생해 ‘이제 평화를 가져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숱한 젊음을 앗아간 DMZ는 사람만 빼고 동식물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허락한 곳이었다. 최 씨는 DMZ를 지배하는 자연이 가장 완벽한 색깔과 장면을 허락해줄 때까지 같은 장소에서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

“한겨울 눈이 철조망을 포근히 감싸는 장면을 찍기 위해 3개월간 군부대에서 대기하면서 현장을 오갔습니다. 한 장소에 자꾸 가니까 군에서 월북이 의심된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는군요.”

무명용사 고이 잠들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무명용사비 위령비 순직비가 작가를 맞았다. ‘제임스 E 오메리 상병을 기억하기 위해’ ‘무명용사의 묘’ ‘고 김상국 병장 전우 여기 고이 잠들다’….
무명용사 고이 잠들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무명용사비 위령비 순직비가 작가를 맞았다. ‘제임스 E 오메리 상병을 기억하기 위해’ ‘무명용사의 묘’ ‘고 김상국 병장 전우 여기 고이 잠들다’….
금단의 땅에서 보낸 450일간의 기록은 28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미국 뉴욕 유엔본부 내 딜리게이트 1층 로비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1998년, 일본과 하와이에서 2004∼2005년 3차례에 걸쳐 일부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다. 이번 전시에는 2000∼2003년 촬영작이 처음 공개된다. 최 씨는 “6·25전쟁은 유엔이 수립된 이후 연합군이 처음으로 해외에 참전한 사례로, 이번 사진전을 통해 전투부대를 보낸 16개국과 비전투부대를 보낸 5개국 등 21개국에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DMZ에서 철책선 경계를 서기 전에 선임 병사가 낭독하는 짧은 다짐을 지금도 기억한다. DMZ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말이라 항상 되새긴다고 했다.

“분단의 고통 속에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지나온 반세기, 오늘도 어김없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이 땅에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경계근무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이상.”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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