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 강연·인터뷰]『北에 「정신적 식량」도 제공』

  • 입력 1998년 5월 29일 19시 20분


“북한엔 먹을 수 있는 식량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식량이 고갈돼 있기 때문에 정신적 식량을 제공하는 게 중요합니다.”

황장엽(黃長燁)전 북한노동당비서는 29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기독언론인모임(총무 鄭逸和·정일화) 월례 조찬 강연에 나와 북한주민들이 남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깨닫고 개혁개방의 길로 가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가 강조한 ‘정신적 식량’이란 주체사상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인간애(人間愛)를 의미하는 듯 했다.

▼ 남북문제 온건인식 가져 ▼

망명 1년을 맞은 황씨는 요즘 각종 사회단체의 초청강연회에 활발히 응하고 있다. 그의 기조강연이 이어졌다.

“남북이 어떤 형태로든 교류와 접촉을 강화해 북한주민들이 남한의 실상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남한동포들이 북한동포를 한겨례로 사랑하고 동정하며 가슴아파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

황씨는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지난해 4월20일 서울에 막 도착했을 때 그가 했던 말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당시 “북한을 개혁 개방시키면 북한경제가 급속히 살아나고 인민생활도 정상화돼 김정일(金正日)체제만 더 공고화 될 뿐”이라면서 “따라서 북한을 더 고립시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이 (남북문제 해결의) 최선의 대안”이라고 주장했었다.

대북(對北)접근방식에 대한 그의 생각이 1년 사이에 이처럼 바뀐 이유에 대해 그는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면서 “배우면 배울 수록 한날 한시에 해방된 남북의 차이가 천양지차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남북한을 직접 비교, 체험함으로써 남북문제에 대한 사고의 폭과 깊이를 넓힐 수 있었고 나아가 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인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설명인 듯 했다.

몸은 남쪽에 있어도 생각은 늘 북에 가 있다는 황씨는 그의 망명 후에도 북한의 사정이 달라진게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이 끝나자 참석자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북한의 종교활동 실태는 어떤가.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돼 있긴 하나 실제로는 철저히 종교를 반대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없고 가짜로 믿는 경우만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다.”

―남한의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북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와서 보니 언론기관이 활발히 활동하고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언론이 앞으로 북한 문제와 조국통일의 필요성을 좀 더 많이 취급했으면 좋겠다. 또 국민의 애국정신을 교양하는데도 힘써주길 바란다.”

―북한에 정신적 식량이 없다는 말은 주체사상과 관련이 있는 얘기인가.

“북한엔 수령 절대주의가 완전히 미신화돼있다는 말이다. 내가 말한 주체사상은 실제로는 인도주의이고 민주주의이다. 원래는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상인데 이를 수령이 절대주의인 것처럼 바꿔 버렸다. 이런 것을 허물기 위해선 정신적 식량의 중요 원천인 종교나 민주주의 사상이 북에 들어가야 한다.”

―종교에 대한 견해는….

“종교사상의 사랑이나 용서 정신에 대단히 공감하고 있고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여기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이 가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내세를 생각하기 보다는 현실세계에서 동포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더 급하기 때문이다.”

▼ 독재자 없어지면 곧 개방 ▼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이 북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북은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핵을 놓고 외교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보려고는 해도,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정책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일이 실각한다고 당장 북한이 개혁 개방되는가.

“김정일정권은 철저한 개인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북한이 살 길은 개혁, 개방 밖에 없다. 독재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와 주민들이 그냥 따라가고 있지만 독재자가 없어지기만 하면 전 주민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개혁, 개방으로 나갈 것이다.”

〈한기흥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