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공덕귀여사]민주-인권수호 앞장선 여성운동 代母

  • 입력 1997년 11월 24일 19시 42분


24일 세상을 떠난 고 윤보선(尹潽善)전대통령의 미망인 공덕귀(孔德貴)여사는 대통령영부인으로서, 또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일선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투사」로서, 인권운동가로서 현대 한국사에 보기드물게 큰 발자취를 남긴 여성계의 「거목」이었다. 경남 충무태생인 공여사는 여신학자로서 조선신학교(한신대전신)의 전임강사로 재직하던 중 서른여덟 나이에 당시 서울시장을 지내던 해위(海葦·윤전대통령의 아호)와 결혼했다. 그 후 공여사의 삶은 말그대로 파란의 연속이었다. 4대 대통령의 부인으로 「영광」을 누린 것도 잠시 뿐. 취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해위는 또다시 야당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고 공여사는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제2의 생」을 시작하게 된다. 남편인 해위가 민청학련 배후조종, 3.1구국선언주동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서는 등 전직대통령으로서 형언하기 어려운 핍박을 받던 70년대 중반의 유신시절 공여사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인권위원장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에 민주화운동 일선에 나섰다. 캄캄한 정치상황속에서 허허롭게 「어제의 영부인」이라는 겉옷을 벗어던진 공여사는 구속자가족협의회회장,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위원, YH대책위원회위원 등으로 동분서주하는 등 우리 사회의 춥고 어둡고 사랑이 필요한 곳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가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여사는 해위와 사별한 뒤 출간한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라는 자서전에서 『소리를 지르며 남편을 말리다 못해 차라리 이 어른이 일찍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떠올릴 지경이었다』고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다. 〈김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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