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탄10용사 신화」전하는 마지막 생존자 신현주씨

  • 입력 1997년 6월 24일 19시 52분


『徐富德(서부덕)이등상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정말 남자다웠지. 저기 누워 있는 金鍾海(김종해)는 나이가 어려 김막둥이라 불렀구. 모두들 일당백의 용사였는데…』

6.25전쟁 47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辛賢柱(신현주·72·충남 금산군 금산읍)씨는 6.25남침 1년전인 49년 5월4일 새벽 어둠을 뚫고 적진으로 달려가던 부대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당시 이등중사(병장)였던 신씨는 「육탄10용사」일화로 유명한 국군1사단 11연대 2대대 출신. 49년 당시 개성에 주둔하던 신씨의 부대는 송악산 일대의 경비를 맡고 있다가 인민군의 기습을 받았다.

순식간에 적에게 넘어간 비둘기 고지는 개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요충지. 신씨의 부대원들은 미군에서 인계받은 지역을 곧바로 빼앗길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진지를 탈환하려면 토치카를 까부셔야 한다』 사단장교의 말에 1소대는 소대장을 비롯한 전원이 공격에 앞장서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작전상 인원제한이 불가피해 서이등상사와 신씨 등 11명이 뽑혔다.

중대장은 4일 새벽 출동하는 이들에게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미 전날 낮에는 중화기 소대의 朴昌根(박창근)하사가 혼자 수류탄 7개를 들고 토치카로 돌진하다 전사했다.

신씨 등 11명은 어둠속에 해발 3백여m의 고지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올라갔다. 인민군이 비오듯 쏴대는 기관총탄과 지뢰를 뚫고 특공대는 일제히 토치카에 뛰어들며 수류탄을 던졌다. 이어 지원병력이 투입돼 4∼5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되찾았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11명중 나와 김부태라는 동료만 살고 9명이 전사했더군』

부대원들은 이틀동안 토치카를 파괴하고 산화한 10명을 위해 개성의 대대본부안에 「육탄10용사 기념비」를 세웠다. 김부태씨는 부상후유증과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다 4년전 세상을 떠났다.

신씨는 『규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국립묘지에 묻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송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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