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釋誕日 법정스님인터뷰]『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사회를』

  • 입력 1997년 5월 13일 08시 04분


법정스님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혼탁해도 부처님은 항상 그안에 계신다. 인간의 마음과 뇌리에도 부처님이 좌정하고 계시지만 헛된 진리와 욕심에 사로 잡힌 인간은 자기안의 부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진리를 찾아 밖을 헤매고 다니거나 향락에 몸을 던진다.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감성과 지성으로 세속 인간의 영혼과 심성을 감동시켰던 「무소유」의 法頂(법정·65)스님. 지난 2년간 일체의 글쓰기를 중단하고 강원도의 한 두메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된 자유인의 삶을 누려온 스님이 불기 2541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셨다.》 <대담=오명철 사회1부 차장> ―20리길을 걸어내려 와야 인가가 있는 곳에 거처를 정하신지 어느덧 6년째로 접어듭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지난 92년 4월19일 17년간 지내온 전남 승주 조계산 중턱 불일암(佛日庵)을 내려와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짜기로 들어왔습니다. 한 곳에 오래 살면 안이해지고 타성에 젖게 되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출가(出家)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났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식대로 살 수 있어 좋습니다. 밤에 촛불과 등잔밑에서 책을 읽거나 자연의 소리를 듣다 보면 우리가 문명의 이기(利器)에 너무 길들여져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전등불은 그림자가 없으나 촛불과 등잔불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매일밤 촛불과 등잔불의 그림자 아래에서 인간의 근원과 뿌리를 생각하고 빛에 대한 고마움을 사무치게 느끼게 됩니다』 스님의 거처는 해발 8백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5월중순경에야 봄이 오고 11월초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오지중의 오지. 남녘에선 일찌감치 져버린 진달래가 요즘에서야 피기 시작했고 소쩍새와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전에는 우박이 내렸다. ▼ 「성찰의 시간」 필요해 절필 ▼ ―지난 2년여동안 사실상 절필상태로 지내오신 연유를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글을 너무 많이 쓴데 대한 자책으로 그런 것입니다. 출가한 사람은 세상에 대해 꼭 할소리만 해야하는데 습관적으로 글을 쓰다보니 내안에 고인 것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옛 선사(禪師)의 법문(法文)에 「때로는 높이 높이 묏부리 위에 서고 때로는 깊이 깊이 바다밑에 잠기라」(高高峰頂立 深深海底行)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제게도 침묵하는 기간, 성찰의 시간, 자기 응시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글빚을 정리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이럭저럭 2년여의 기간이 지났으니 6월경부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독자들을 뵙도록 할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서울나들이를 하신 스님에게 산중(山中)의 일만을 여쭤볼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로 화제를 옮겼다. ―우리나라에 언제 태평성대가 있었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금의 현실은 정말 심각한 것 같습니다. 『올해 첫날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온 국토가 어지러울 정도로 바람이 휩쓸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올 한해는 무척 세상이 시끄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엄청난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뭔가 세기말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질 만큼 가지고 차지할 만큼 차지한 이후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결국 삶의 질은 「인간의 가슴이 따뜻해 지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가진 것이 적고 없이 살아도 사람의 가슴이 따뜻해지면 우리의 삶은 훨씬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한 세대전 우리들은 연탄 한장, 쌀 한되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결국 「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개인이 자기의 삶을 새롭게 구축하지 않는한 우리 시대와 사회는 결코 변화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난국을 어떻게해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산에서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가 어느덧 부계중심의 사회에서 모계중심의 사회로 무게중심이 옮아가는 것 같습니다. 가정의 경제권과 자녀들에 대한 교육권, 대소사에 대한 결정권을 어머니들이 주도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들의 깨달음이 없이는 병든 사회를 구출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결코 우먼파워나 페미니즘 차원의 입장은 아닙니다. 가정뿐 아니라 환경오염 과소비 사회적비리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어머니들의 「창조적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총체적 난국도 결국 우리들의 모성적(母性的)지혜와 사랑을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집안에서도 어려울 때 어머니의 지혜와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듯 비리와 부정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사회도 어머니의 관용과 아량으로 서로를 감싸주어야만 치유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차남 賢哲(현철)씨 비리사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현철씨와 그 측근들의 비리는 결국 제 분수를 넘은 욕망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지 못해 빚어진 일이지요. 끼니와 자녀교육비, 치료를 위해 돈을 받았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돈과 명예를 가질 만큼 가졌고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검은 돈을 주고 받은 것은 제 분수를 넘은 탐욕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물을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 이같은 결과가 빚어지게 된 데에는 국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이들을 지도자로 뽑은 우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친 김에 김대통령의 하야와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전대통령의 사면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넌지시 여쭤 보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스님은 차분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소신을 피력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의 하야가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헌정중단 사태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다음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위해서라도 그런 불행한 사태가 생겨서는 안됩니다. 국민이 대통령의 과(過)와 허물을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난관을 극복한 뒤 새로운 정부를 맞이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소박한 소망입니다. 덧붙여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분들이 이미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법률적 사회적 단죄를 받을 만큼 받았으니 나머지 인과응보는 우주질서에 맡기고 적절한 시기에 법률적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21세기를 이끌어갈 다음 대통령은 어떠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첫째, 거짓말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돈과 권력에 오염되거나 도취하지 않는 사람이면서 국민을 자신의 가족보다 더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가 경영과 통일에 대한 확고한 경륜과 포용력을 지닌 가슴이 따뜻하고 넓은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다음 대통령은 진심으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돼야 하며 이른바 대선주자들은 자신이 진정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겸허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장로인 김대통령의 신앙생활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여러차례 「불편한 심기」를 표명한 적이 있다. 불교계의 존경받는 어른인 스님은 천주교 춘천교구장인 張益(장익)주교와 오랫동안 남다른 교분을 나눠왔고 일면식도 없는 꽃동네 吳雄鎭(오웅진)신부에게 소리소문없이 성금을 전달하는 등 타종교인들과도 격의없이 지내왔다. ▼ 大苑閣 「봉사 도량」 만들것 ▼ ―대통령의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의 신앙생활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자는 자기 종교의 종파적 편견에서 벗어나 타종교인들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인들도 대통령의 신앙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보편적 선(善)은 같으며 또한 모든 종교는 「자비의 실현」이자 「사랑의 실천」을 공동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종교가 탄생한 시대와 역사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사람의 입맛이 다르듯 종교에 대한 생각도 각기 다른 것입니다. 「임제록(臨濟錄)」에는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조사(祖師·한 종파를 세운 사람)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그리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마저 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죽이라」는 것은 「극복하라」는 뜻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해탈이요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스님은 지난해 10년여 고사끝에 한 독지가로부터 3공화국 시절 정재계 거물들의 사교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울 도심의 대원각(大苑閣)을 시주받았다. 일평생 종단의 직책이나 사찰의 주지 맡기를 단호히 사양했던 스님은 「시절 인연」에 따라 요즘 이달말로 임대가 끝나는 대원각을 이 시대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수도 교화 봉사의 도량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원력(願力)을 쏟고 있다. 『사찰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로 정했고 그동안 이일을 많이 도와주신 靑鶴(청학)스님에게 주지를 맡겼습니다. 6월부터 절에 조그만 부처님을 모시고 창건을 위한 1백일 기도 입재식(立齋式)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시주자의 귀한 뜻이 있으니만큼 부처님의 가피(加被·보살핌)가 있을 것입니다』 불일암 시절 스님은 마음에 드는 책을 여러권 쌓아두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권해주곤 했다. 요즈음은 일본 법륭사의 대목수(大木手)인 니시오카 쓰네카쓰(西岡常一)가 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삼신각)과 유시화시인이 옮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이레), 그리고 소설가 정찬주가 쓴 「암자로 가는 길」(좋은날) 등이 특히 마음에 들었노라고 추천하신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