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승건]박지성이 끌고 갈 유소년 축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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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유소년 단계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울리 슈틸리케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10월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 이란과의 경기에서 진 뒤 한 얘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선 진출을 위해 영입한 외국인 감독의 발언으로는 적절치 않았다. “자식을 대학 보내려고 족집게 과외 선생님을 데려왔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제대로 공부를 안 해 어렵다고 하는 격”이라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한국 축구 유소년 시스템은 늘 취약했다. 다른 분야도 그렇듯 ‘눈앞의 결과’에만 매달렸던 탓이 크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고도 ‘히딩크 논란’ 등으로 홍역을 겪었던 대한축구협회는 얼마 전 대대적인 인사를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영웅들이 여럿 포함됐다. 당시 주장 홍명보는 행정을 총괄하는 전무이사, 막내급이었던 박지성은 유스전략본부장이 됐다.

10월 중순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이 인적 쇄신을 약속했을 때만 해도 “바꿔 봤자…” 하는 여론이 많았다.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 협회가 ‘회전문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인선이 발표되자 놀랐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특히 박지성의 선임은 큰 화제가 됐다. 그는 누리꾼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까임 방지권’, 줄여서 ‘까방권’을 가진 인물이다. ‘까임’은 공격 또는 비난을 받는다는 뜻의 속어로 웬만큼 잘못하지 않고서는 욕을 먹지 않는다는 얘기다. 박지성의 발탁에 대해 많은 팬들은 “협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얼굴마담’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박지성은 비난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주장이다.

11월 28일 축구회관 앞에서는 초중고교 지도자와 학부모 수백 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시위를 준비한 학원축구 위기극복 비상대책위원회는 “월드컵이 한국 축구의 전부가 아니다. 근간인 아마추어 축구가 흔들리는데도 대책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학원 축구지도자의 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의무 취득’ ‘방학 중에만 전국대회 개최’ ‘전학 제한’ 등 현재의 제도와 규정들에 큰 문제가 있다며 해결책을 요구했다. 모두 유소년 축구 시스템과 직결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내년부터 본격 시행될 ‘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의무 취득’ 문제는 협회도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대로라면 ‘축구지도자 자격증’이 있어도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이 없는 학원 지도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제도적인 것들뿐만이 아니다. 현재 지도자들 가운데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이들도 많다. “유소년 축구는 알고 보면 모든 게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박지성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생각이 깊고 신중하다고 전한다. 협회가 내민 직함을 고민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2000년부터 감독을 하며 서울 신정초교를 국내 최강으로 만든 함상헌 감독은 “한국 축구의 아이콘인 박 본부장은 경험이 많은 데다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다. 마음먹고 한다면 많은 부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본부장 선임 뒤에도 영국에 계속 머물렀던 박지성은 2일(한국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월드컵 조 추첨에 초청인사로 참석한 뒤 3일 한국을 찾아 유소년 축구 발전을 위한 업무를 시작할 계획이다. ‘박지성 본부장’을 계기로 현안이 산적한 한국 유소년 축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강력한 ‘까방권’을 가진 박지성이기에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
#박지성#유소년 축구#스포츠지도사 자격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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