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하트시그널을 보내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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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최근 종영한 채널A ‘하트시그널’은 미혼 남녀들의 짝짓기 프로그램이다. 자유로운 청춘은 물론이고 군대 간 남자들도 생활관에 모여 본다는 인기 예능인데, 시청률을 견인한 것은 20대가 아니라 30, 40대 남녀였다. ‘○○맘’ ‘△△아지매’ 같은 주부들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이거 보느라 밤에 젖병도 안 씻고 잤다” “결혼 전 연애 감정이 되살아나 맥주 한 캔 더 땄다”는 시청 소감이 이어졌다. 이들은 출연자와 함께 두근대고, 상심하고, 질투하며 새삼 깨달았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설렘이냐.”

한국의 부부는 로맨스와 거리가 멀다. 지난해 라이나생명과 강동우 성의학연구소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부부의 36.1%는 성관계가 월 1회 이하인 섹스리스 커플이다. 국가별 통계는 없지만 이 정도면 일본과 함께 ‘침실에서 불꽃이 튀지 않는 나라’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라고 한다. 일본가족계획협회가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발표한 일본 섹스리스 커플은 47.2%였다.

잠자리를 식히는 냉매제로는 자녀 문제에 올인 하는 가정 문화와 함께 맞벌이 부부의 증가가 지목된다. 하지만 옛날 동서독 주부들의 성생활을 비교 연구한 결과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난한 동독의 워킹맘들이 온갖 가전제품을 들여놓고 사는 서독의 전업맘보다 오르가슴을 두 배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유럽 전문가인 크리스틴 고드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사회주의 여성들이 더 나은 성생활을 누렸다”고 소개했다. 엄혹한 공산 정권하에서 살았던 여성들은 “고단했지만 내 삶은 로맨스로 가득 찼었다”고 추억한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 딸들은 “퇴근 후엔 남편과 좀비처럼 앉아 TV만 본다. 아이 가질 엄두를 못 낸다”고 하소연한다는 것이다.

고드시 교수는 동유럽 모녀 세대 간 성생활 격차의 원인을 성 격차(gender gap)에서 찾는다. 여성 해방이 주요 과제였던 사회주의는 성 평등 정책에서 앞서갔다. 옛 소련이 여성 참정권을 허용한 때가 미국보다 3년 빠른 1917년이다. 전후 여성 노동력이 절실했던 사회주의 정부는 공공 세탁소와 식당,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출산 휴가를 다녀와도 일자리 사라질 걱정이 없었고, 초등학교에선 남녀가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1952년 체코 성의학자들은 여성 오르가슴을 연구하기 시작해 1962년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남성이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한 좋은 섹스는 없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뒤늦게 성 격차와의 관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못사는 나라들의 경우 성 평등 수준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지만, 선진국에서는 성 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다시 말해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나라에서 출산율도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패러독스’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발표한 성 격차 지수 나라별 순위에서 116위와 111위로 하위권을 차지한 한국과 일본이 대표적인 섹스리스, 저출산 국가인 점도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

하트시그널을 본 워킹맘은 “죽도록 사랑한 사람이 결혼 후 맞벌이, 독박 육아 살림에 죽일 놈이 돼가는 건 우짤까요”라고 한탄했다. 집 안에서 부부간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집 밖에서 경제 참여와 정치적 권한의 남녀 간 불평등이 바로잡히지 않는 한 설레는 로맨스도 출산도 없다. 부부의 내밀한 잠자리 사정이 정부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여성을 만족시켜야 유능한 정부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하트시그널#여성을 만족시키는 정부#저출산 문제#성 격차#한국 부부의 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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