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해]김우중은 DJ와 이헌재에게 배신당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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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 논설위원
최영해 논설위원
이헌재가 다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것은 금융감독위원장이 된 직후인 1998년 4월 서울 남산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서였다. 김우중은 자금난에 봉착했으면서도 “대우는 걱정하지 말게. 일부러 대우를 조이지만 않으면 돼”라고 말했다. 이헌재에게는 야인(野人) 시절 물심양면으로 돌봐준 회장님의 부탁이었다. 김대중(DJ)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이헌재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DJ 청와대와 이헌재 사단에 의해 공중분해 된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재무부 재정금융심의관에서 옷 벗은 이헌재는 미국 유학을 떠난다. 뉴욕 출장길에 나선 경기고 6년 선배 김우중이 “공항 앞에서 아침 식사나 하자”고 하자 ‘고단한 유학생’ 이헌재는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안개 길을 헤치고 9시간 동안 운전해 온다. “어렵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하버드대 최고경영자코스(AMP) 추천서를 써 달라는 부탁에 김우중은 추천서에다 14주에 2만5000달러(약 2500만 원)인 학비까지 줬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회장님,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라며 대우에 들어가 ㈜대우 전략담당 상무, 대우반도체 대표이사를 지냈다. 2년 반 동안 김우중의 세계 경영과 함께했다.

김우중은 DJ를 끝까지 신뢰했던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대통령에 당선된 DJ는 “나는 정치는 잘 알지만 경제는 잘 모르니 김 회장이 경제를 해 달라”고 했다. 김우중은 청와대 경제 관련 회의 고정 멤버가 됐다. 재벌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 김우중은 DJ를 청와대에서 회동하고,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에서 부부 동반으로 만났다. 김우중은 “DJ가 나에게 확언을 해줬는데…. 열심히 하다 보면 잘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하지만 이로부터 넉 달 뒤 DJ는 “5대 그룹도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에 넣을 수 있다”며 압박했다. 김우중은 사재(私財)를 포함해 12조 원을 담보로 내놓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리고 두 달 뒤 1999년 10월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고, 2005년까지 행방불명 신세가 됐다.

김우중은 당시 상황에 대해 “채권단이 자금 지원을 해주지 않아 내가 계속 항의하니까 여러 경로를 통해 ‘김 회장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니 해외에 좀 나가 있어라’는 얘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DJ에게 전화해 확인하니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기호 경제수석도 만나 ‘잘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전도사’라는 이헌재는 김우중 부재 때 고래 배를 가르듯 거침없이 대우를 털어버린다. 이헌재는 이를 ‘시장의 힘’이라지만 김우중은 ‘정부의 기획해체’라며 분노했다. 이헌재가 대우를 너무 잘 알아서 혹독하게 칼질했다는 뒷담화도 나왔다. 김우중이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DJ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린 현대그룹에는 회사채신속인수제라는, 전례 없는 특혜성 제도를 만들어 도와줬다. 현대는 대북(對北)사업 후원 기업이었다. 대우 입장에선 이런 차별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깼다며 자화자찬한 DJ정부가 재벌 대안으로 내놓은 ‘벤처 띄우기’는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대우를 인정사정없이 칼질하기까지 권력 막후에선 어떤 정치공학과 셈법이 있었던 걸까. DJ는 왜 김우중에게 해외로 나가 있어라 했고, 김우중은 또 무슨 꿍꿍이로 정권이 바뀔 때까지도 해외 유랑을 했나. ‘칼잡이 이헌재’에게는 어떤 감정일까. 이헌재가 DJ, 노무현 정부에 이어 안철수 캠프까지 기웃거린 속내는 무엇일까. 추석 때 김우중과 이헌재 회고록을 비교해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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