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희생양 만들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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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한 달 전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 이야기부터 해 보자.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 할머니가 잘못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말귀가 어둡다. 대화가 쉽지 않다. 그래도 고객센터의 남자 직원은 친절하다. 할머니가 엉뚱한 얘기를 해도 짜증 한 번 내지 않는다. 말끝마다 ‘고객님’이란 존칭도 꼬박꼬박 붙인다.

코미디보다 더 웃긴 실제 상황이다. “LG유플러스입니다”라는 직원의 말에 할머니는 “LG에 불이 났어요?”라며 동문서답이다. 자신이 걸어놓고 할머니는 “왜 전화했느냐”고 직원에게 묻는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여기저기 물어봤다. “나도 저 할머니처럼 늙게 될까 봐 두렵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직원의 융통성 없음에 짜증이 났다”고 말하는 이도 의외로 많았다.

그 직원은 아마도 고객 응대 매뉴얼에 맞춰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귀가 어두운 할머니에게 “LG유플러스입니다”와 “고객님”을 반복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도록 해 주는 게 최선이다. 그래야 할머니도 편해지고, 다른 고객들의 대기 시간도 줄어든다.

물론 이 직원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으리라. 감정노동자의 고충을 따로 말해 뭐하겠는가.

상담원, 판매사원, 창구직원, 승무원이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고객의 ‘비위’에 맞춰야 한다. 이들에게 감정을 표출하는 건 절대금물. 그러니 참고, 또 참는다.

한바탕 웃음을 안겨준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직원은 어쩌면 행운아다. 시비를 걸자고 달려드는 악질 고객을 만나면 당해낼 수가 없다. 라면 때문에 시달리다 폭행당한 대한항공 여승무원이 그런 사례다.

지난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 56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항공기 승무원이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정도가 가장 높았다. 5점 만점에 무려 4.7점. 홍보도우미나 판촉원이 4.6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을 기준으로 전체 고용인구 1600만 명 중 70% 정도인 1200만 명이 서비스산업에서 일한다. 이 가운데 600만 명 이상이 감정노동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일반 사무직 직원들도 감정노동을 한다. 그들은 상사라는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 인사권을 쥐고 있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고객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직장인은 감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감정노동은 일반적인 노동과 달리, 오래 하면 우울해질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를 ‘미소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란 한 노래의 가사가 적어도 감정노동자에게는 사실인 셈이다.

오히려 더 비뚤어질 수도 있다. 자신의 미소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고객(상사)에게 항의하지 않는다. 무조건 순종. 그 대신 상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는 약자인 부하 직원에게 푼다. 부하 직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권위를 앞세우기 위해 충동적으로 화를 낸다. 모든 문제가 부하 직원들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자신은 아무 문제없는데, 부하 직원들이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한다. 욕도 많이 한다.

때로는 집에 있는 아내나 자식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면 그걸 빌미로 아이와 아내를 구박한다.

정말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과 상담을 받을 리가 없다. 괜히 다른 사람의 우울증만 부추기는 꼴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직장인들이여. 자신을 돌아보시라. 혹시, 희생양을 찾고 계신 건 아닌지….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희생양#감정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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