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여자니까, 여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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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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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여성동아팀장
김현미 여성동아팀장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여성 장관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재임 기간 1999년 6월∼2003년 2월·44개월)이다. 그전까지는 전두환 정부 시절 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1982년 5월∼1985년 2월·33개월)이 기록 보유자였다. 김정례 전 장관이 언젠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보사부에서 ‘웬 치마 장관’이냐고 빈정거렸답니다(그는 외출 때 항상 한복을 입었다). 자기들끼리 ‘길어야 6개월이지 얼마나 하겠어’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다 두어 달 겪어보더니 ‘6개월이 뭐야, 6년은 가게 생겼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치마뿐만 아니라 바지도 문제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황산성 환경처 장관이 국회에서 바지 차림으로 답변을 하다 혼쭐이 났다. 당시 황 장관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된 것. ‘여자가 바지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건방지게…’라는 평가가 대세였고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경질됐다.

뒤이어 문민정부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된 김숙희 장관에게는 비전문가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대학 총장도 안 해본 영양학 전공자가 어떻게 교육부 장관을 하겠느냐는 의구심은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도 안 낳아본 여자가 무슨 교육을 알겠느냐는 식의 인신공격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신낙균 씨도 부임 초기에 웃지 못할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현장 시찰 도중 시민들과 악수하며 “문화관광부 장관 신낙균입니다”라고 하면 “아, 장관 사모님이십니까”라는 반응이 돌아온 것. 남자로 착각하기 쉬운 이름 탓을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성 장관보다 장관의 아내 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과학자 출신인 김명자 장관은 임명 당시 “환경정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물”로 환영을 받았다. 발목을 잡은 것은 이혼 경력. 정확히 말해 이혼 사실을 얼버무린 장관의 태도가 문제가 됐다. 지금이야 결혼, 비혼, 이혼, 재혼 모두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이혼 경력은 고위 공직 임용에서 중대한 결격 사유로 작용했다.

그런 현실에서 굳이 사생활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김 장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쨌든 김 장관은 초기 구설을 빼곤 이해관계가 얽혀 분쟁이 끊이지 않는 환경부에서 외유내강의 ‘여성적 리더십’을 구사하며 역대 최장수 환경부 장관, 김대중 정부 최장수 장관,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여성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명자 장관을 변곡점으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진일보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으로 여성 국무총리(장상)를 지명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한명숙)를 배출했다. 그리고 지금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를 지켜보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부드러움과 강력한 리더십’을 앞세워 여성 대통령론을 들고 나왔다. “여자니까 안 돼”가 “여자라서 가능하다”로 바뀐 것이 격세지감이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여성성을 앞세운 것은 자충수일 수 있다. 역대 ‘치마장관’들이 그토록 바랐던 “여성이 아니라 능력과 업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희망을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택의 기준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자질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김현미 여성동아팀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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