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추석의 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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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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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첫 대화 주제는 고려 무신정권이었다.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에 대한 총평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띤 토론. 대화는 어느새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으로 옮아갔다. 그에 대한 인물비평이 이어졌다. “왕건이야말로 겸손의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이지. 암, 그런 왕이 드물어.” “아니죠. 왕건은 호족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힘도 못써 본 왕이에요. 초기의 고려는 왕국이라기보다는 호족연맹국가에 가깝죠.”

역사학자 서재의 풍경이 아니다. 추석 연휴, 어느 집 거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기대했건만. 남자들은 결론도 내지 못할 거대 담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날을 위해 칼날을 갈기라도 한 듯 설전은 치열했다.

아주 짧은 휴식. 이번엔 대선을 놓고 ‘폭풍 토론’이 시작됐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는 적극 두둔하고, 상대방 후보는 혹평한다. ‘역사 논쟁’ 때보다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누가 들으면 싸우는 줄 알겠다.

이 풍경엔 오롯이 남자들만 등장한다. 여자들을 보려면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필자에게 전한 여성은 “남자들은 다 왜 그래?”라고 말했다. 왜 남자들은 모이면 역사니, 정치니 하는 거대 담론을 떠들기 좋아하냐는 물음이다. 그러게. 왜 그럴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굳이 정치논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유가 뭘까. 남성호르몬이 많아서? 그건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정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지만 남성호르몬의 분비량은 줄어들지 않는가.

위기에 몰린 중년 남성의 허세가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된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중년의 위기는 여성이 오히려 더 크다. 수험생 자녀가 있다면 더 그렇다. 입시 준비 뒤치다꺼리하느라 몇 년을 쥐죽은 듯 살아왔는데, 아이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훨훨 둥지를 떠나버린다. 오죽하면 이 무렵의 엄마가 느끼는 서운함과 쓸쓸함을 빈 둥지 증후군이라 할까.

폐경도 큰 위기다. 폐경은 말 그대로 월경이 끝났다는 뜻이다. 월경은 생산능력을 상징하므로 폐경은 여성성의 상실로 받아들여진다. 폐경을 맞은 여성들이 대부분 우울해하는 건 이 때문이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는 신체변화는 그 다음 문제다.

폐경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 이에 따르면 월경은 출산을 의미한다. 월경이 끝났다는 것은 더이상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출산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비로소 여성이 자아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맞는 셈이다. 이 해석을 적용하면 폐경은 월경을 완성하는 ‘완경(完經)’이 된다. 이미 여성계 일부에서는 이 단어를 쓴다.

필자는 이 해석에 담긴 적극성에 끌린다. 그렇기에 중년 아내들에게 ‘명절 뒤끝 작렬’을 주문하고 싶다. 남자들이 다 왜 그러느냐고 빈정대지 말고 스스로 거대 담론에 뛰어들면 어떨까. 신문도 꼼꼼히 보자. 정치와 역사 평론이 남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자.

거대 담론의 변화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학사를 새로 쓴 지동설도 처음에는 작은 논문 형태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변화의 시작은 늘 소박하다. 명절을 끝낸 이 순간,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이다.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추석#대선#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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