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이재오가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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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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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정치부장
박제균 정치부장
이재오 의원이 현 정권 실세로 한창 잘나갈 때다.

주말을 맞은 고위 공직자 A 씨가 북한산 둘레길을 돌다가 이재오 의원 일행과 마주쳤다.

“멀리서 그분이 오는 게 보였다. 평소 안면이 있어 인사하고 악수를 나눈 뒤 길옆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도 마주쳐 지나치기에 불편한 좁은 길이었다. 뒤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목례를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많아야 십수 명일 거라고 생각했던 일행이 끝이 없었다. 내가 목례를 하니,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계속 답례를 하는 바람에 인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한 200명이나 됐을까. 길옆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계속 눈인사를 해야 하는 뻘쭘한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정권 실세 이재오와 마주치자…

A 씨는 왜 길옆에 비켜서서 이재오 의원도 아닌, 일행에게까지 계속 어색한 인사를 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권력이다.

이재오 권력의 정점은 이른바 ‘친박(친박근혜) 학살’이라고 불린 2008년 공천 때였다. 당시 공천 작업에 깊이 관여한 인사의 얘기.

“그때도 ‘개혁공천’을 내세웠지만, 철저한 나눠먹기였다. MB(이명박 대통령)가 꼭 챙겨야 할 몇몇 인사를 제외하면 이재오, 이상득 의원의 나눠먹기나 다름없었다. 그 틈새시장에서 이방호 전 사무총장을 비롯해 공천에 직접 관여한 이들이 자기 사람을 심었다.”

이들 핵심실세 가운데 이상득 의원은 최근 측근 비리의혹 등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자칫 검찰에 소환될 처지다. ‘만사형통(萬事兄通)’의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이다.

이방호 전 사무총장은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뒤 권토중래를 꿈꿔왔지만 지역구(경남 사천)가 하필 남해-하동(현역 의원은 새누리당 여상규)과 합구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은 이 지역을 전략공천 대상으로 선정했다. 권력무상이다.

이재오 의원의 경우는 새누리당 공천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가 시끄럽게 격돌한 뒤에야 공천이 확정됐다. 공천위는 ‘이 의원이 지역구(서울 은평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했지만, 내심 친이(친이명박)계를 포용하는 상징적 제스처로 공천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그런 공천위의 의도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점. 이재오를 살렸다고 해서 친박이 친이를 보듬었다고 느낄 국민이 얼마나 될까. 친이가 형해화(形骸化)된 지 오래인 터에 그런 발상이 썰렁할뿐더러 이재오 공천으로 새누리당의 헌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오히려 ‘이재오를 살리는 대신 친이를 다 죽이려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재오 의원의 처신이다. 민중운동가 출신 4선 의원에 ‘정권의 2인자’로 불렸던 실세 중의 실세가 자신 때문에 소속 당이 분열 위기에 처했음에도 선수(選數)를 하나 더 늘리기 위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도대체 정치가 뭐기에…’라는 근본적인 물음마저 던지게 만든다.

공천 반납 드라마로 윈윈해야

본인에겐 섭섭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재오 의원은 분열의 아이콘이다. 18대 공천 파동에 따른 집권당 분열사태는 결국 MB 정권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자신과 함께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상득 의원처럼 떼밀려서 나갈 것인가.

아직도 이재오 의원과 새누리당이 모두 윈윈하는 길은 남아 있다. 공천을 자진 반납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은 포용력은 보여줬으되, 정권심판론엔 덜 묶일 수 있다. 이 의원으로선 그동안 덧씌워진 분열과 권력욕의 이미지를 한번에 털고 감동적인 정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다시 설 수 있다. ‘제 몫만 챙긴다’는 인상의 보수우파에도 큰 힘을 보태줄 것이다. 그것이 이재오가 죽어서 사는 길이다. 인물정보에 실린 이재오 의원의 가훈은 이랬다.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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