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외환위기 前夜’를 떠올리는 요즘

  • Array
  • 입력 2011년 6월 6일 20시 00분


코멘트
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태국에서 아시아 외환위기가 시작된 직후인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냈다. 뚜렷한 대주주가 없던 기아는 김선홍 회장과 강성 노조의 야합으로 비리가 만연한 부실기업이었다. 부채는 10조 원, 분식결산은 5조 원을 넘었고 부품 빼돌리기가 다반사로 이뤄졌다.

그해 12월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대권 주자들은 이런 부패기업을 감싸기에 급급했다. 대선 직전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바뀌는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8월 기아자동차 공장을 찾아가 “기아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에는 기아가 법정관리 대신 화의(和議)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처음에는 경제논리를 강조하다가 “정부가 기아를 살려야 한다”며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기아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면서 법정관리를 통한 신속한 처리에 반대했다.

68개 사회단체가 참여한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과 일부 언론인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모범적 국민기업’으로 기아를 치켜세우고 “제3자에 넘기지 말고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리기업을 국민기업으로 바꿔놓은 무책임한 주장이 기승을 부리면서 기아 처리는 시간만 끌었다. 임기 말 레임덕에 시달리던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한 달 전인 10월 22일에야 법정관리 방침을 확정했다. 기아 처리의 향방을 지켜보던 외국인들은 부도 후 석 달간의 진행 상황에 넌더리를 내며 썰물처럼 한국을 빠져나가 외환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기아 문제와 함께 우리 경제의 신인도 하락을 부채질한 금융 및 노동개혁 법안 표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안 모두 시급한 개혁 과제였지만 야당은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을 잡았고 여당은 질질 끌려다녔다. 한국은행과 노동계 같은 이해당사자들은 걸핏하면 집단행동에 나섰다. 대선이 끝난 뒤 IMF의 압력으로 만든 법안은 원안보다 국가적, 국민적으로 훨씬 불리한 내용이었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부질없지만 1997년이 대선의 해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외환위기 전야(前夜)’를 다룬 다양한 기록을 읽어 보면 아마 그랬다면 사태가 그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수 있다. 대기업과 금융회사의 무분별한 투자와 차입, 경상수지 적자가 커졌는데도 원화가치를 높게 유지한 YS 정부의 정책 실패가 위기의 1차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선이라는 정치 이벤트에 매몰돼 국가경제는 파국으로 가건 말건 정략적 판단과 행동만 판을 친 정치권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 치러지는 ‘선거의 계절’이 내년으로 다가오면서 여야 정치권은 어떻게 하면 쌀독을 박박 긁을 수 있을까 경쟁하고 있다. 재정위기로 추락한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의 오늘에 눈을 감고, 나라 곳간을 채울 생각은 안중에 없다. ‘경제 영토’를 확대하고 일자리를 늘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도 정쟁거리로 전락했다.

정치가 경제를 돕기는커녕 훼방을 놓기 일쑤인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더구나 큰 선거판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면 ‘쪽박을 깨지 않는’ 여야 대결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분탕질 쳐놓고 지나가면 뒤처리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건전한 시민사회세력과 지식인, 국민이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려야 한다. 현명한 국민은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만 어리석은 국민은 같은 오류를 되풀이한다. ‘외환위기의 실패’는 한 번이면 족하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