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박병엽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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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8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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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권희 논설위원
홍권희 논설위원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계에 내놓은 아이폰이 4년 만에 7400만 대 팔렸다. 그의 생각과 말, 건강 상태가 모두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런 잡스도 지난날 퍼스널컴퓨터 개발 경쟁에서 IBM에 패해 회사를 떠났다가 12년 만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한국에서라면 잡스의 재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모처럼 예외가 나와 반갑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다. 그는 25일 팬택 주주총회에서 ‘지난해 말까지 14분기(3년 반) 연속 흑자 달성’을 보고하고 올해 매출 3조 원을 새 목표로 제시했다. 5년 전 공격적으로 펼쳤던 해외사업이 부진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팬택은 2007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이 됐으나 예정대로 올해 말 졸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채권단은 밝혔다.

한때 ‘한국 벤처 신화’였다가 워크아웃의 수모를 당한 박병엽은 죽으려고 한강 다리까지 갔다. 그는 아파트를 판 돈 4000만 원과 직원 6명으로 문자페이저(일명 삐삐) 업체를 차려 15년간 연평균 65%씩 성장시켰다. 세계 7위의 휴대전화 업체로 키워냈다가 넘어졌을 때의 상실감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을 각오로 다시 도전했다. 4000억 원으로 평가되던 지분 모두를 회사 재생을 위해 던졌다. 부도 위기의 대기업이 기업어음(CP)을 발행하거나 대주주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가 적지 않은 국내 풍토에서는 보기 드문 결정이었다.

채권단에 의해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된 박병엽은 주말도 없이 일했다. 미국 유럽도 당일치기나 무박 3일 출장이 보통이었다. 채권단은 빚을, 미국 퀄컴의 폴 제이콥스 회장은 밀린 로열티를 각각 출자로 전환해줬다.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닥치자 박병엽은 “애플과의 정면승부”를 외치며 시리우스 베가 등 신제품을 내놓았다. 팬택의 시장점유율은 서서히 높아져 지난해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LG전자를 따돌리고 2위에 올랐다.

채권단은 지난해 박병엽에게 스톡옵션을 선물했다. 액면가 500원인 주식을 주당 600원씩에 984억 원어치(증자 후 지분의 9.1%)를 살 수 있는 권리다. 상장 폐지된 팬택의 주식평가액을 현재(주당 300∼400원)의 두 배 이상으로 올리고 증자대금을 끌어와야 그도 돈을 벌 수 있다. 주식 없는 창업자 박병엽은 전화 통화에서 “기업을 다시 소유하기보다는 임직원 주주 채권단이 합심해 기업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매출이나 이익 같은 재무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좋은 물건을 만드는 기술기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팬택은 전체 인력의 55%가 연구개발(R&D) 인력이고 품질관리 인력까지 합해 70%가 엔지니어다. 국내외 특허를 3000여 건 갖고 있다. R&D 투자액은 워크아웃 기간 중 7000억 원이었고 올해도 2600억 원에 이른다. 그가 작년부터 “애플을 제압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배경이다.

오늘로 박병엽이 창업한 지 만 20년이다. 세계적으로 기업의 10년 생존율이 30%, 20년 생존율이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의 부침은 더 심하다. 한국은 기업 수명이 더 짧다. 40대 후반의 박병엽은 “요즘 ‘창업자에게 경영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경영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에게서 새 시대의 기업가정신이 보인다.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같은 도전하는 기업인을 찾기 힘든 이 땅에 ‘박병엽’이 더 많아야 한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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