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의 東京小考]센카쿠 갈등 해결, 지혜는 없는걸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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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일이다. 사진기자와 함께 아사히신문의 소형 제트기를 타고 옛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북방 4개 섬을 비행한 적이 있다. 소련군이 시코탄 섬에 군 기지를 짓는다는 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게 목적이었다. 섬의 남측 상공에 다다르자 멀리 북측 해안선을 따라 하얀 선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좀 더 확실히 보기 위해 조종사가 고도를 낮추려고 하자 자위대의 레이더 기지에서 경보가 들어왔다. 소련 전투기가 접근하고 있으니 빨리 철수하라는 것이다.

인근 구나시리 섬에서 급발진한 것일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종석의 레이더에는 전투기로 보이는 형체가 잡혔다. 우리 쪽 제트기는 소련이 주장하는 영공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음에도 소련군은 그마저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격추될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수를 돌렸다.

5년 전에도 아사히신문의 비행기가 다케시마(竹島·독도)에 접근했다가 비슷한 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는 상공에서 쫓겨날 우려는 없다. 일본이 실효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센카쿠 열도는 중국 측이 바다로부터 접근함에 따라 대소동이 일어났다. 일본 영해에 들어와 조업을 하다 일본 순시선의 추격을 받은 중국 어선이 궁지에 몰린 나머지 순시선에 부딪힌 사건이 발단이 됐다. 선장이 체포되자 중국의 항의는 증폭됐고 석방되기까지 고압적인 보복조치를 잇달아 내놓았다.

석유자원 확인 이전엔 침묵하더니

본래 류큐(琉球·현 오키나와·沖승)의 일부였던 센카쿠 열도는 1895년 정식으로 일본 땅으로 편입됐다. 당시는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이어서 중국 측은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대만뿐 아니라 센카쿠 열도까지 탈취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러일전쟁 중인 1905년 일본이 시마네 현에 편입한 다케시마와 약간 경위가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오랫동안 센카쿠 열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센카쿠 주변 해저에 석유자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1971년부터. 이 때문에 1972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때 이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도 있었지만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교섭에서 “그것은 보류하자”고 발언했다.

이 같은 태도를 한층 선명히 보여준 것은 1978년 일본을 방문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그는 일중 평화우호조약의 비준식에 참석한 후 기자회견에서 센카쿠 문제의 보류를 분명히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는 지혜가 없다. 다음 세대는 좀 더 지혜가 있지 않을까. 그때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영토분쟁 회피의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고 일본도 종종 다케시마 문제에 적용하는 표현이다. 후에 확고부동한 권력을 다지고 개혁개방 노선을 주도한 덩샤오핑에게 일본 방문의 최대 관심은 일본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중국의 근대화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칸센을 타고 “빠르네, 빠르네, 이게 바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이야”라고 했다. 또 일본의 최신 공장을 둘러보며 “지금 ‘근대’라는 것을 보고 있다”며 감탄했다. 당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에게는 “중국처럼 가난한 친구를 둬 달갑지 않겠지만 잘 부탁한다”며 농담을 섞어 말하기도 했다.

이에 보답하듯 일본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중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뤄 국내총생산(GDP)으로 일본을 제친 올해 센카쿠에서 도발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노골적 변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물며 팽창하는 중국 해군의 의도가 숨어있다면 더욱 곤혹스럽다.

문득 생각나는 것은, 중-일 국교정상화가 있기 바로 전 해인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헨리 키신저 대통령보좌관과의 회담에서 저우언라이가 강조한 대목이다. “일본은 팽창주의적 경향이 있다. 일본의 경제는 팽창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군사적 팽창으로 이어질 것이다.”

中대국화의 오류 되풀이 말아야


당시 중국은 눈부신 부흥을 달성한 일본에 지원을 기대하는 한편 군사적 부흥에는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키신저는 “미일 안보조약으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아야 한다”는 소위 ‘병마개론’을 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경제적 팽창에서 군사적 팽창으로’라는 저우언라이의 우려는 그대로 중국에 되돌려주고 싶다.

덩샤오핑은 지금쯤 센카쿠 소동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다음 세대도 지혜는 없나 보다”며 한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벨 평화상을 둘러싸고 중국이 고립되고 있는 요즘 일본이 대국화의 고양감에서 저지른 과오를 중국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본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대항하면 위험하다. 강대국화하고 있는 중국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우리가 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역시 큰 지혜가 필요하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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